30대 철없는 초등교사 아들과 60대 어머니의 힐링 문답 에세이
Prologue - 아들의 이야기
"이게 사람 사는 집이야? 야이 미친놈아!!!!"
예고 없이 아들의 원룸에 방문한 엄마의 찢어지는 듯한 고성에, 어젯밤 숙취에 짓눌려있던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렸습니다. 몽롱한 가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도 욕할 줄 알던 사람이던가?' 엄마가 욕하는 모습은 30여 년 평생 처음 봤습니다. 놀라움은 살바람처럼 잠시 스쳤고, 그 빈자리는 짜증이라는 감정이 스멀스멀 채워졌습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아들한테 욕을 하는 엄마가 어디 있어?', '그리고 누군가에게 아직 보여줄 준비가 안된 터전에 예고 없이 방문한 사람이 누군데?'
제 삶은 지금까지 늘 그래 왔습니다, 잘된 것들은 다 제 덕이고, 잘못된 것들은 다 엄마 탓이지요. 이렇게 오늘 모자간의 갈등이 초래된 이유도 바로 엄마의 예고 없는 방문 때문입니다. 고단한 몸을 겨우 일으켜 눈을 홉떠봤습니다. "연락을 하고 오던가 해야지! 갑자기 와놓고 이렇게 아들한테 욕하는 엄마가 어디 있어?"라고 크게 역정을 내려 목청을 가다듬던 그 순간 제 눈에 쌓여 있는 플라스틱 1회용 용기들이 들어왔습니다. 어제, 그리고 며칠 전 배달 음식을 시켜 먹고, 치우기가 귀찮아서 그대로 쌓아놨던 것들입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주변을 둘러보니, 방안이 엉망이었습니다. 널브러진 옷가지들, 개봉만 하고 바깥에 내놓지도 않은 택배 박스들, 주위를 폴폴 날아다니는 고양이 털들..... 본능적으로 지금은 엄마에게 화를 낼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이고 엄마..... 전화라도 하고 오시지.
기왕에 오신 김에 같이 방 좀 치워주세요~^^;;"
엄마는 먼길 운전하고 온 고단함을 풀 새도 없이 청소를 시작하셨습니다. 거실에 발 디딜 틈 없이 널브러진 택배 박스들을 차곡차곡 정리해서 건물 바깥에 내놓으셨고, 아들과 함께 거실, 방 안의 쓸데없는 물건들을 치우고, 쓸고, 닦았습니다. "아이고 미친놈아 미친놈아 이런 데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라는 혼잣말을 계속 중얼거리시면서요. 중간중간 다 큰 아들의, 하지만 세상의 무게에 축 쳐진 등짝에 손자국을 내는 것도 잊지 않으셨습니다. 도움이 필요하고, 할 말이 없는 아들은 그저 받아들일 뿐이지요.
이후로 몇 시간이 지나서야, 원룸 내에 겨우 두 사람이 편안하게 숨을 쉬고, 대화를 나눌만한 공간이 확보되었습니다. 엄마는 그제야 장거리 운전으로 고단했던 몸을 잠시 매트리스에 뉘이셨습니다. "아들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어떻게 이런 데서 사람이 살아? 혹시 요새 힘든 일 있었어?"
엄마의 노곤하지만 따뜻함이 가득 묻어난 음성에 지나온 최근의 과거들을 떠올렸습니다. 종잡을 수 없는 학생들의 마음과 행동, 자잘한 업무 실수들, 내 맘 같지 않은 인간관계, 그로 인한 스스로를 향한 채찍들. 부차적인 다른 것들보다 스스로의 한심함에 제일 힘이 들었습니다. 극복하기 위해 친구에게 하소연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열심히 책도 읽어 보고, 강의도 들어봤습니다. 그래도 위로가 되지 않는 날에는 술을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다 잠들고, 출근하고, 퇴근하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거나, 책을 읽고, 강의를 듣다가 다시 술을 마시는 날들이 반복되었습니다.
왜 저는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요? 친구도, 책도, 강의도 무조건적으로 저만 바라보는 제 편은 아니었습니다. 친구는 친구만의 고유한 삶이 있었고, 책과 강의는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엄마는 제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제 편이 아닌 적이 없었습니다. 비록 제가 어른이 되고, 제 삶에 치중해 바빠졌을 때도 언제나 먼저 손을 내밀었던 쪽은 엄마였었습니다.
"아들 요새 어떻게 지내? 힘든 건 없어?"
그런 거 없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아들의 대꾸에 상처받았음이 틀림없을 엄마는 그래도 늘 먼저 전화를 거셨고, 안부를 물으셨습니다. 거기에 응답하지 않은 것은 저였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저녁까지 이어졌습니다. 저의 힘들었던 이야기를 했고, 기쁘고 행복했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저를 키우며 힘들었던 이야기, 엄마의 행복했던 이야기, 그리고 욕도 할 줄 아는 엄마는 저에게 더 이상 저를 낳아주셨기에 당연한 '엄마'가 아닌 한 명의 '사람'이었습니다.
저녁을 먹을 때도, 잠자리에 들기까지도 이어진 대화들은 많은 성찰을 가져왔습니다. 엄머라는 이름이 아닌 한 여자 사람의 삶에 대한 이야기. 저라는 사람과도 밀접하게 이어져 온 그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싶어 졌습니다. 저라는 사람은 글 쓰기를 참 좋아하니까요. 피곤함에 몸을 뉘인 엄마에게 슬며시 말을 걸었습니다.
"엄마, 조선시대 한석봉 이야기에서 엄마는 떡을 썰고 아들은 글을 썼다고 하던데 우리는 같이 글 한 번 써 볼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