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연휴가 되어서 시댁에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눈이 오기 시작했고, 저녁에는 오래된 주택의 뜨끈한 아랫목에 앉아 밖으로 난 커다란 거실창으로 바라보는 내내 눈발이 굵어졌다. 대설주의보가 내린 참이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서 앞마당에 나와보니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이 20cm는 쌓여있었다. 아이들은 아침을 먹고 눈사람을 만들기에 한창이었고, 나와 남편은 아이의 생일 케잌을 사기 위해 시내로 나가기로 했다.
"점심으로 낙지를 사다 먹으면 어떨까?"라고 남편이 제안했고, 우리는 낙지도 사고 근처에서 케잌도 살 겸 그곳에서 가장 큰 재래시장으로 향했다. 바닷가 도시에 위치해 있어 신선한 수산물이 잔뜩 나오는 이곳 재래시장에 들른 지 몇 년은 된 듯했다. 시장에서 먹었던 핫도그와 튀김이 먹고 싶어졌다.
설날 전날이라 시장은 활기가 넘쳤다. 몇 년 만에 왔지만, 시장은 변한 데가 없었다.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핫도그집에서 갓 튀긴 치즈 핫도그를 사 먹고,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오래된 분식집에서 산처럼 쌓아놓은 오징어튀김을 바라보다가, 이걸 사 먹으면 점심이 맛없어질까 봐 아쉬운 마음을 안고 포기했다. 시장의 한가운데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이제 수산물을 파는 가게들이 이어졌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 골목은 시끌벅적했다. 생선과 굴을 사는 사람, 회를 떠가는 사람을 틈에 끼어 낙지의 가격을 묻다가, 그 골목에서 조금 벗어나있어 상대적으로 한적한 어머님의 단골집에서 낙지 네 마리를 샀다.
낙지 말고 무얼 사갈까를 고민하며 다시 수산물 가게의 수조들을 기웃거렸다. 수산물 가게는 구경하는 것만으로 재미나다. 커다란 수조 안에서 물고기들이 헤엄치는 모습도, 각종 소라와 조개들이 한가득 쌓여있는 모습도, 낙지나 주꾸미가 빨간 대야 안에 숨죽이고 들어앉아 있는 모습도 모두 눈길을 빼앗는다. 수산물 가게에서 일하는 이름 모를 이모와 삼촌들도 왠지 다른 가게들보다 더 활기찬 분위기다. 그분들은 자신들의 가게 앞을 지나가면 주저함이 없이 "뭐 드릴까?"를 묻는다. 커다란 방수 앞치마를 두른채 손이 꽁꽁 얼도록 추운 바깥공기를 마시고, 그보다 더 차가운 물이 계속 흐르는 수조 안에 손을 계속 담그면서도 그분들은 위축되지 않는다.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거침없는 손길로 회를 뜨거나, 생선을 손질한다.
그 활기찬 생동감을 마음속에 오래 담아두고 싶었다. 삶은 그 밀도라는 것이 늘 진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상태로 잔잔하게 흘러가기 마련이지만, 재래시장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 '지금, 여기'라는 감정이 훨씬 진해진다. 지금, 여기 삶이 흘러간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이 파닥거린다. 말소리와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는 재래시장에 가보는 게 어떨까. 적극적인 삶의 자세는 그곳에서 배울 수 있다.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오래되어서 너무나 능숙한 솜씨를 엿보고, 덤으로 얹어주는 넉넉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 활기찬 골목을 요구르트 매니저가 타고 다닐 것 같은 전동 카트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이모를 불러 세워 시장표 다방 커피를 사 먹었다. 이모가 커피의 가격이 1500원이라고 하길래, 시장 가격치고는 비싸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이 커피는 믹스 커피 마니아로서는 꼭 사 먹어야 하는 커피였다. 보통의 믹스커피잔과 폭은 비슷하지만 길이는 세배쯤 긴 특이한 종이컵에 커피와 프림과 설탕을 황금비율로 능숙하게 타넣고 휘리릭 저어서 건네주는 따끈한 커피를 마셨더니, 다음번에 시장에 또 오고 싶은 이유가 한 가지 더 추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