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오해는 금물
여기서 '밥'이란 식사의 개념을 의미하기에 꼭 밥과 반찬이 함께 차려진 한식뿐만 아니라 면과 빵 등 끼니를 대신할 수 있는 모든 음식을 밥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집에서 밥' 사이에는 '먹는'이라는 형용사가 숨어있다. 그러하니 여기에서의 집밥은 집에서 요리한 음식은 물론, 배달음식, 포장해 온 음식 모두 해당된다.
타블로가 투컷과 1/N 하려고 스탠퍼드에서 석사까지 한 것이 아니듯
나도 몰랐다. 주말만 되면 하루 종일 밥 생각만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우리 부부는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지금과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비싼 등록금이 무서워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아온 나는 결혼해서 배우자의 학자금을 함께 갚아왔다.
주말 내내 바쁜 업무에 치여 회사에 출근 한 배우자 이면에는 하루 종일 집에서 냉장고를 털어 메뉴 고민하는 어미가 있다. 결혼한 지 10년이 넘었는데도 요리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인 것을 보니 앞으로도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은데 아이들이 독립하기 전까지는 이러한 (집에서 밥을 하는) 일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초등성적이 고등성적까지 그대로 이어지지 않아 장래희망이 여러 번 바뀌고 목표하는 대학도 나란히 하향되었다. 데자뷔를 보는 듯 20대에 결혼을 하며 학업과 경력의 그래프는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대학원에 가고 전공을 살리는 경력은 잇지 못했다.
가정을 꾸리고 육아를 하며 자연스레 발생하는 집안일은 청소, 빨래, 자동차의 점검 및 장비와 세차, 요리, 설거지, 장보기, 이부자리 개고 펴기, 신발 정리, 분리수거, 자녀 돌보기 등 세어보자면 끝도 없는 일들이다. 꼭 필요한 일이지만 안 하면 티가 바로 나는 일들의 90% 이상을 맡고 있다.
가계 수입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이러한 일들은 누가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지출만 해대느라 결국 '집에서 밥을 차리려고 여성으로 태어난 게 아닐 텐데...'라는 생각까지 닿아버린다. 그럼에도 이 일을 배우자나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하는 이유는 해야만 하는 일 때문만은 아니다.
스스로가 어느 순간부터는 이 일이 지금 당장은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겨졌다. 이 일이란 집에서 밥을 하는 일뿐만 아니라 아이들에 맞게 메뉴를 고민하고, 함께 식사하며 대화를 나누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등 모든 일련의 집안일들을 나보다 더 맞춤형으로 해낼 수 있는 인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밥'의 진짜 의미
거의 대부분 한 그릇 요리로 밥상을 차려낸다. 그리고 밥을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생각되면 과감히 시간 절약을 위해 배달주문도 서슴지 않는다. 매일 짧은 요리영상들을 둘러보며 간단하면서도 맛있는 레시피를 뒤적거리곤 한다. 한마디로 어찌어찌 집밥을 차려낸다는 의미다.
그런데 하필이면 주말인데 식기세척기 세제가 똑 떨어졌다. 5인가족 주말 설거지양을 비유하자면 조금 과장해서 세탁기 없이 빨래를 해내야 하는 수준이다. 아침 먹고 설거지. 점심 먹고 설거지. 저녁으로 카레라이스를 계획했는데 카레는 오래 끓여야 맛있으니까 미리부터 재료를 손질하고 볶고 끓이고 또 설거지를 한다.
한마디로 9 to 6의 직장인처럼 낮시간동안 계속 주방에 있었다는 소리다. 게다가 첫째 아이의 조별과제로 친구들까지 저녁을 먹고 가는 소식을 접했을 때는 드디어 체념했다. 주말 내내 냉장고를 비우느라 난감하던 차에 드디어 배달어플을 열고 돈가스와 우동을 주문했다. 집에서는 흰밥만 준비해 놓았다.
배달온 우동을 그릇에 옮겨 담고, 돈가스를 자르고, 냉장고에서 꺼낸 깍두기와 밥을 차례로 식탁에 건네주니 어느새 오물오물 먹는 다섯 명의 아이들이 보였다. 식사를 하고 간다니 처음에는 남루한 요리 실력이 금세 드러날까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했는데 이렇게 먹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조금 이상했다.
아이들이 먹고 있는 모습이 정말로 너무 예뻤다. 우동을 먹는 아이, 돈가스만 먹는 아이, 깍두기도 먹는 아이, 만화책을 보면서 먹는 아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조심스럽게 먹는 모습이 모두 사랑스러웠다. 제 손으로 준비한 것은 겨우 밥뿐이지만 집에서 밥을 하는 일에 대해 처음으로 좋았던 순간이었다.
마치 tvN <응답하라 1988>의 치타여사가 된 기분이었다. 30년 전만 해도 동네마다 이웃집이나 친구집에서 밥 먹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텐데 요즘은 다르다고 생각했었다. 아마도 이제야 함께 식사하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 같다.
함께 식사하며 밥 한 끼 하는 것으로 집에서 밥을 하는 일에 대하여 큰 기쁨을 느끼게 해 준 아이들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안부를 묻고 현재 마음까지 모두 다 드러나는 어린이들의 먹는 모습이 귀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는 게 이런 의미인가 싶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