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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지법

by 소똥구리

하늘이 파랗던 어느 날 아침, 축지법을 터득했다. 힘들이지 않고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절대비급이다. 다만 아무 때나 아무 곳에서나 쓸 수는 없다.


아침 6:35, 지하철이 공덕역에 도착한다. 축지법을 발휘할 때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다음 역으로 출발하면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8호차 꼬리칸으로 이동한다.


지하철이 앞으로 나아갈 때 뒤쪽으로 걸어가니 몸이 앞으로 쏠린다. 발만 들면 힘들이지 않고 구름에 달 가듯이 앞으로 슥슥 나아간다. 무중력인 듯 휙휙 발걸음이 가볍다.


일산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면서 터득한 비법이다. 경기도 사람은 일생의 1/10을 전철에서 보낸다는 말이 있다.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숨 쉴 공간도 없는 피난행렬 같은 풍경이다. 이런 통근을 매일 같이 하고 있으니 무언가 신공을 얻어도 이상하지 않다.


몇 가지 비급이 더 있다. 흔들리는 전철에서 손잡이를 잡지 않고 유튜브를 볼 수 있는 만근추 신공과 어쩌다 나는 자리를 재빠르게 탐지하는 천리안 신공도 얻었다. 내공 소모가 너무 커서 잘 쓰지 않지만 급할 땐 지하철역 계단을 뛰어오르는 능공허도 신공도 있다.


록 신공을 얻었지만 그간 강호에서 얻은 내상이 깊다.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많이 상했다.


금강불괴나 만독불침의 경지를 원하지 않는다. 강호를 떠나 조용히 초야에 묻히고 싶을 뿐. (25.7.25,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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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상비_제주@소똥구리(18.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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