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브레이크 테크놀로지
2000년 4월, 서울 삼성동 코엑스 바로 앞에 노브레이크 테크놀로지 본사가 마련되었다. 위치 좋은 빌딩의 한 층을 모두 빌려 인테리어도 새로 하고 최신식 사무집기가 속속 도착을 한다. 한국 인터넷 부흥의 중심인 테헤란로에 들어오는 것만으로도 뭐랄까 꽤나 두근거리며 멋진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설렘을 만끽할 수 있었다. 대전에서 야심 차게 시작했던 사이트를 운 좋게 판매하여 서울 가락동 시영아파트 13평형을 4,500만 원에 전세 계약했다. 아주 오래된 아파트라서 시설이 좋지는 않았다. 어둡고 좁고 무엇보다 시장이 가까워서 그런지 바퀴벌레가 많다. 하지만 살벌한 서울 하늘 아래에 우리 세 식구 머물 곳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최대한 즐겁게 살기로 다짐한다.
당시 노브레이크는 국내 대형 통신회사와 프로젝트 계약이 되었다. 개발팀과 국내영업팀이 이 대형 프로젝트에 올인하고 있는 동안 해외사업을 맡은 나는 우선 일본 사업을 재정비하기로 했다. 기존에 언급한 대로 노브레이크 게시판 'CrazyWWWBoard'는 이미 일본에서 널리 사용 중이었다. 배너가 달린 게시판 서비스인데 아직 그런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기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무료라서 그런지 수많은 사이트에서 애용하고 있었다. 물론 게시판 인터페이스는 일본어로 되어 있었고, 번역 및 서비스 제공은 몇 년 전부터 파트너사가 담당을 하고 있었다. 무료 서비스도 있었지만 배너를 원하지 않는 유저에게는 유료 서비스를 제공하여 수익을 발생시켰고 그중 상당 부분을 파트너사가 취하고 있었다. 향후 일본 시장이 더욱 확장될 것으로 예상하였기에 일본 비즈니스에 대해서 새로 판을 짜야하는데 이 파트너사가 걸림돌이 되고 있었다. 노브레이크 임원진에서는 정식으로 일본에 법인을 세워서 수익의 100%를 가져오기를 희망하는데 당연히 지금까지 일본 시장에 공을 들인 파트너사는 그게 싫었던 것이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내가 합류하기 전에 일본법인 설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이미 1억 원을 파트너사에 송금을 한 상태였다. 정리하자면, 파트너사도 일본법인 설립에는 동의해서 1천만 엔을 송금받았지만 수익 배분에 대해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고 있는 상태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임원 한 명과 함께 도쿄로 출장을 갔고, 며칠간의 상의에도 불구하고 일본 서비스의 주인은 본인들이라는 주장에 더 이상 대화가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임원 3명과 함께 깊은 논의 끝에 새롭게 일본 법인을 설립하고 그 파트너사와는 계약을 끝내기로 했다. 파트너사의 대표가 한국인이었기에 이미 송금한 1억 원은 국내법 기준으로 반환 소송을 진행하기로 했다. 일본법인 설립 및 사업 진행은 내가 맡기로 함으로써 잘 나가는 벤처기업에 합류하자마자 규모가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상대는 당시 떠 오르는 국내 토종 검색엔진 '네이버'였다. 아직은 야후에 비해 규모가 작았지만 나름 탄탄한 기반을 다지고 있는 상태였다. 네이버에서 게시판 서비스를 준비 중인데, 협력업체로써 노브레이크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고 서울로 본사를 옮긴 후 본격적으로 미팅이 시작된 것이다. 새로 마련된 회의실에서 네이버와 노브레이크는 삼대삼 임원진 회의를 하였는데, 네이버에서는 이해진 사장이 주축이 되었고 나는 임원은 아니지만 핵심 관계자로서 참석 추천을 받아 참여를 하였다. 이해진 사장은 키가 크고 수수한 모습에 전형적인 엔지니어 스타일이었다. 지금은 커질 대로 커진 네이버의 의장으로서 얼굴을 보기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대표이자 실무 담당자로써 현장을 직접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서로 좋은 이야기가 많이 오갔고 당장 결정할 단계는 아니기에 계속적으로 미팅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노브레이크 서울 본사 개업식을 하였는데 그때도 귀빈으로써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 주셨다. 비록 계약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앞으로 있을 많은 큰 인물과의 만남중 처음이라 지금도 그때의 감정과 기억이 또렷하다.
노브레이크에는 3명의 등기이사가 있다. 3명의 주식 지분이 동일하다. 이번에 투자 유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분율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들이 생기면서 내부적으로 분열이 시작되었다. 3명 모두 강한 성격의 캐릭터라서 고집이 세었고, 헝그리 벤처기업에 규모가 큰돈이 오가는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의 주판으로 계산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견물생심. 돈이 없을 때에는 직원 모두 똘똘 뭉쳐 잘 살아보자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리지만 예상치 못한 빠른 시점에 돈이 보이니 우왕좌왕하며 구심점 없이 회사는 흘러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그리고 아무런 지분 없이 회사일에만 몰두하는 내가 그들에게는 편안한 상담 파트너가 되었고, 그들이 사업보다는 사익에 더 신경을 쓰면 쓸수록 회사의 중요 업무는 점점 내가 맡아가고 있었다. 나는 좋았다. 점점 회사에서의 역할이 커지고 자본력이 있다 보니 여러 가지 기획이 가능했다. 펼쳐보고 싶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다듬고 다듬어서 진행을 하였고, 심지어 수천만 원짜리 신문광고도 잡지 광고도 모두 가능했다. 대전에서 처음 인터넷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10만 원짜리 배너 광고도 군침만 흘리다 만 것을 생각하면 눈물 날 정도로 좋았다. 앞으로 이 회사를 발판으로 정말 큰 바다에 나가 도전과 모험을 맘껏 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