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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이와 일이 Mar 28. 2023

규슈올레

  < 규슈올레 첫 단추 >


야심 차게 도상으로 세운 계획의 첫 단추를 멋지게 채우려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JR福工大前(훗쿠다이마에역)驛까지는 잘 갔다.  JR근교선의 표를 자동발매기에서 끊어 열차를 탔다.  목적지에 내려 바로 역 앞의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그런데 걷는 시간만 4~5시간이지 열차와 버스로 이동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실수였다.


 올레 출발점까지 우리를 실어줄 버스는 이미 떠났고 다음 버스는 두 시간 뒤에 있다. 돌아올 시간을 계산해 본다. 영낙없이 첫날부터 어둠 속을 헤매겠구나 하는 생각에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돌아 서야 했다. 첫 단추부터 제대로 끼우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긴장의 고삐가 풀어진 결과였다.  


여행 시작부터 김이 빠지면 짜증이 나고 이후 일정 전체를 잘해 나갈 수 있을지 불안감이 들게 마련이다.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닐진대 동행 사이의 관계도 악화될 수 있다.


발생한 실수는 재빨리 시정하고 유연하게 일정을 수정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열여덟 개의 규슈 올레 코스는 규슈 전역의 크고 작은 도시들에 위치하고 있다.  우선 규슈 전 지역을 열차와 버스 등으로 이동하는 기술을 익혀야 한다.  당분간 있을 시행착오를 미리 각오하자. 그리고 우리 부부의 오래된 여행 팀워크를 잘 발휘해 보자.


 후쿠오카(福岡) 도심 걷기로 분위기 반전을 시도한다.  


 ‘후쿠오카 도심 걷기’는 마음을 가라앉혀 보고 사전 몸풀기를 한 격이 되었다. 구입한 14,000엔짜리 JR패스는 다음날부터 활용하기로 했다.


카날시티(Canal-City)라는 하카타역 근처의 유명한 복합쇼핑센터를 향해 걷는다. 거리의 풍경은 신정 연휴를 즐기는 들뜬 표정의 현지인들과 관광객들이 신호등 불빛에 따라 멈추었다 가기를 반복하는 흐름이 수로를 따라 빠른 유속으로 흐르는 짙푸른 강물과 어우러진다.  멋진 수변공원과 아치형 다리와 사람들이 어울려 하나의 풍경이 된다.  무채색의 키 큰 빌딩들 너머로 맑고 푸른 휴일 오후의 하늘빛이 포근하다.  


한 시간 반 비행시간 끝에 마주 선  낯선 도시의 긴장과 설렘이 서서히 익숙함으로 스며들고 현지의 정서에 한껏 젖어든다.

                < 오호리 강변 길 & 카날시티 쇼핑몰    >


 일본을 구성하는 네 개의 큰 섬은 기후와 지리뿐 아니라 역사의 부침(浮沈)도 달랐다.  근․현대 일본이 에도(江戶, 현재의 도쿄)가 중심이 되면서 혼슈(本州)에 비해 상대적으로 다른 섬 지역들(규슈나 시코쿠나 홋카이도)이 소외와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규슈(九州)는 에도막부에 저항한 최후의 사쓰마(藤摩藩) 번(藩)이 있었던 곳이다.  지리적 위치 탓으로 외부와의 교류가 빈번하여 서양의 문물을 최초로 접하고 수용했던 지역이기도 하다. 개방적이던 이곳 사람들은 일찍이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그 때문에 겪었던 박해와 저항의 역사가 있었다.


한편 규슈(九州)는 고대사는 물론 근현대사에서 한반도와 아시아 대륙과의 교류와 충돌의 역사적 길목이기도 해서 그 흔적들이 주는 묘한 감정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는데 후쿠오카 현(縣)의 신사(神社)인 경고신사(警固神社)가 눈에 들어온다.  새해의 행운과 소망을 비는 참배자들의 동선을 관찰할 수 있었다.

신사의 사(社) 자는 불교 사찰에 주로 쓰이는 사(寺)나, 단순히 건물을 뜻하는 사(舍)도, 제사를 지내는 집이라는 뜻의 사(祠)도 아니다. 사(社)는 토지의 신을 뜻하는데, 토지신에게 제사를 드리러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신사(神社)는 ‘신들이 모여 있는 곳’이고 신에게 제사하고 그 댓가로 액을 막고 복을 구하는 공간쯤으로 짐작이 된다.

 입구에 들어서면 묵은 물건들을 버리며 송구영신(送舊迎新)의 예를 하는 ‘손 씻기 우물’이 있다. 깨끗하게 정화시키고 신당 앞에 줄을 서  차례가 오면 종을 치고, 다음으로 손뼉을 마주쳐 신을 부르고 목례를 하며 기도를 한다. 물러 나와 다시 분향하고, 새해 소망이 담긴 소원지를 적어 나무 사이의 긴 줄에 걸어 둔다. 그 모양이 하얀 학들이 논에 무리를 지어 앉아 있는 모습처럼 보여 자못 신비하고 경건해 보인다.

 < 경고신사에서 참배를 기다리는 사람들>


후쿠오카(福岡) 중심부인 하카타(博多)와 텐진(天神)은 여느 일본 대도시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첨단 건축물들과 근대의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조화를 이루고, 개량된 가옥들도 이전의 원형을 크게 훼손하지 않은 채로 전통식 가옥들과 자연스럽게 시간의 켜를 이루고 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카날시티 식당가에서 줄을 서 기다린 끝에 일본식 스테이크를 먹는다. 오랜 기다린 만큼은 아니어도 약간의 기대조차 저버린 맛에 실망을 금할 길이 없다. 역시 일본에서는 스시와 꼬치를 먹어야 한다.


실망도 잠시!  후쿠오카 제일경 오호리(大濠) 공원을 향해 걷는다. 노을이 지며 어둠 사이로 도시의 야경이 기지개를 켜는 이 시간은 정주(定住)하는 사람이든 유랑(流浪)하는 사람이든 고달픈 하루를 살아낸 선물로 주어지는 휴식의 시간이다. 해 질 녘부터 밤이 깊어가며 다시 깨어나는 도시를 즐길 수도 있고, 고단한 몸과 영혼을 쉴 수 있는 황금의 시간인 것이다.  

                                       <  오호리 공원 >


 오호리(大濠) 공원은 인공호수에 조성된 거대한 공원이다. 저녁의 휴식과 운동을 즐기는 현지인들의 여유가 보기 좋다.  호수 중간에 정자가 있는 다리를 건너는데 휘영청 밝은 달이 이국의 정취를 돋운다. 일본식 정원이라고 따로 구분된 구역은 날이 저물어 들어가 볼 수 없었다.


돌아가는 어둠 속 길에서 후쿠오카성(福岡城)의 유적지(遺墟) 표지석과 옛 지도를 그려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조선 반도가 200KM 거리에 있는 이 성은 방어 목적이든 공격용이든 반도와 대륙을 향한 것들이었다. 역사를 요란스레 들추어 보지 않아도 내가 딛고 있는 이 땅이 이틀 전 내가 서 있던 공간과 지근거리였음을 실감한다.

 길 건너로는 호국신사(護國神社)가 불을 밝히고 있고 저녁 시간인데도 인파로 북적인다.


여행 중에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거리에 늘어선 식당을 눈으로 고르며 걷다가 카날시티 주변의 해산물 구이집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오피스 빌딩 일층에 있는 큰 식당이었다. 줄이 늘어서 있는데 이름을 써 두고 30분 기다리라 한다. 날도 차고 해서 땀도 낼 겸 주위를 배회하다  10분 뒤에 가 보았다.  앞 뒤에 서 있던 사람들 모습이 보이질 않고 낯선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내 이름을 부르길 기다리며 또 십 분이 흘렀다. 줄을 섰던 사람들이 들어가고 또 새로운 사람들로 줄이 채워진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싶어 종업원에게 물어보니 내 순서가 이미 지났으니 이름을 다시 쓰고 줄의 맨 뒤로 가 기다려야 한단다.


순간 식욕이 사라지고 오기가 발동한다. 다른 곳을 찾아보자. 내가 자리를 비운 것이 잘못이긴 하지만 이미 기분이 확 상한 것을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다.


여기저기 문을 연 상점들을 기웃거리다가 결국 어제 무난하게 먹었던 나가사끼 짬뽕집을 다시 찾았다. 종료 30분 전이었지만 다른 대안을 찾기 어려운 터라 절반 이상의 성공은 거둔 셈이다. 급한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가며 내일의 계획을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특히 아내가 끊은 1인당 14,000엔짜리 JR패스 5일권이 발목을 잡아 그 값에 상응하는 새로운 일정을 슬기롭게 다시 짜야하기 때문이다.


오늘의 실패는 서두르지 말자고 너무 느긋했던 게 원인이었다.  

어쩌면 시작부터 경종을 울린 것이 다행일 지도 모른다.  경건하고 겸손한 자세로 규슈의 올레를 걸으라는 계시(啓示)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일은 JR패스의 효용성을 높이기 위해 원거리를 다녀오는 것이 어떻겠냐는 아내의 제안에 잠시도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일은 유후인(由布院)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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