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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HY Jun 20. 2022

함.즐.함.울

21세기, 인류는 사차산업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인간이 하던 많은 일자리가 인공지능으로 대체되고 있고, 집안의 가전제품들은 인터넷을 통해 직장에서도 원격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운전자없는 차를 타고 출퇴근하며 3D 프린터로 지은 집에 살게 되는 일이 실현될 날이 코앞이다. 그러나 이런 혁명적 생활의 편의는 우리에게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이 무심히 하는 인터넷 활동은 빅 브라더를 능가하는 빅 데이터에 가두어져 분석되고 상업화된다. 자유로운 개인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이익을 창출하는데 쓰인다면, 심지어 한 개인의 구매활동까지 조작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면 그 자유를 온전한 자유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린 어쩌면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얼굴없는 관람자에게 전시되고 있는 ‘대체가능 잠재고객’이기 쉽다. 우리가 부지런히 개척해 놓은 온라인 시장의 활성화는 오프라인 시장의 고사를 초래하고 있으며, 은행 사무며, 관공서 일까지 인터넷으로 하도록 장려되고 있을 지경이니,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 깜짝 놀랄 날도 멀지 않았다.  


기계혁명이 가속화될수록, 우리가 꿈꾸던 공상과학적 꿈의 시대가 왠지 배트맨의 고담시티같은 음습한 기운을 품고 있는 것 같아 무섭기도 하다. 어느 날인가는 매트릭스의 네오가 당했 듯, 묻지마 방문객이 찾아와 빨간 약 먹을래, 파란 약 먹을래 물어보는 날이 오는 건 아닌지, 그러면 빨간 약을 먹겠다고 해야할 지, 파란 약을 먹겠다고 해야할 지 결정해 두어야 하나 잠깐 고민까지 된다. 얼마 전 유명을 달리한 우리 시대 최고의 이론물리학자였던 스티븐 호킹은, 인공지능이 인류 최악의 재앙이 될 수도 있으며 그로 인하여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약을 들고 오는 애들이 인공로봇이 아닐지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 


우리가 겪고 있는 생활의 변화는 역사상 어떤 세대가 겪었던 변화보다 급진적이고 소화해야 할 지식의 양조차 엄청나다. 우리의 생활방식까지 바꿔야 할 것 같은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삶의 기술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21세기 가장 필요한 기술은 ‘공감(共感)’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아날로그 시대 감정의 대표 격인 공감이 격변하는 기술혁명 시대에 가장 필요한 기술이 될 수 있었는지 나누기 전에, 먼저 공감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사건에 직접 반응하는 일반적 감정과는 달리, 공감은 인지적 호응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슬픔을 목도했을 때, 그를 슬픔에 빠진 대상으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의 곁에서 그가 갖는 감정적 조망을 공유할 때가 있다. ‘아,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서 슬프구나. 몇십 년을 함께 하며 나누었던 사랑과 갈등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있구나. 그 세월에는 열정으로 타올랐던 시간이, 싸늘하게 식기도 했던 사랑의 뒤안길도 있었다는데...미처 이별을 준비하지 못해서 더욱 황망하구나.’ 이렇게 타인이 느끼는 감정에 몰입하다 보면, 그의 감정이 온전히 경험되어지면서 자신의 감정적 경험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같이 눈물 흘리며 슬픔을 나눈다면, 그들이 느끼는 그 감정이 곧 공감이다. 공감은 감정적 전염과 다르다. 자신의 서러움에 겨워 초상집에서 곡하는 것은 공감이 아니다. 공감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신이 겪는 것처럼 느끼기는 하지만 그 감정의 저간에는 타인일 수밖에 없는 자아경계의 거리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 가까워짐의 경험때문에 공감은 친사회성 또는 남을 도와주려는 도덕적 감정과도 연결된다.   


그렇다면 정말 뜬금없다는 생각도 든다. 상상을 초월하는 기계혁명 앞에서 공감은 너무 고전적이지 않은가. 우린 머지않아 사람없는 거리를 걸으며 보이지 않는 사람과 대화하며 살아갈 것인데, 무인(無人)의 시대에 공감이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니 어떤 시대적 비장미까지 느껴진다. 반드시 두사람 이상이 같이 치러야 할 감정적 경험을 사람없는 거리에서 경험해야 할 우리의 운명이라니…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러니까 공감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이건 어쩌면 운명과 같은 것이다. 사람이 멀어질수록, 사람이 보이지 않을수록, 옅어지는 인간관계 속에서 우리가 간절히 받고 싶고 나누고 싶은 것이 공감이라는 말일 수도 있다. 


2010년 출간된 ‘아프니까 청춘이다’라는 책은 한국출판 사상 최단기에 100만 부 판매를 기록했다. 손을 내밀어 그 책을 집어 들고 급기야 사게 만든 건 책의 내용이 아니라 제목이다. 요샛말로 제목이 열일했다. 과도한 경쟁, 가족 혹은 자기 스스로가 내건 자신에 대한 높은 기대치, 밤낮없이 갈고 닦아야 할 스펙, 그리고 입에는 풀칠해야겠기에 뛰어든 생활전선 등등으로 영혼이 서서히 고갈해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때, 청년들로서는 ‘걱정마, 아프니까 청춘이야, 청춘은 다 아파.’라는 위로는 잡을수 밖에 없는 동아줄이고 소중한 말씀이었을 것이다. 그 작은 공감이 사람들을 움직인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인데, 그는 이후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 또는 ‘웅크린 삶도 내 삶이니까’ 등과 같은 수필집을 출간했다. 소비자학과 교수답게 트랜드를 읽은 것 같다. 그는 아프고, 흔들리고, 웅크린 사람들을 본 것이다. 아프고 흔들리고 웅크린 사람들이 서점의 매대에 진열된 그들의 모습을 보았을 때, 그들은 누군가의 공감에 끌렸을 것이다, 그것이 사카린 같은 가짜 달콤함이라 하더라도. 


그러나 공감을 이런 ‘감성팔이’에 떨이로 넘겨줄 순 없다. 심리학적으로 공감은 우리가 모르고 지냈던 인간 조건의 배경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공감의 연구가 있어 소개하고 싶다. 여자들이 통증을 느낄 때, 남편이 그 통증 부위를 만져주는 것만으로도 통증의 수준이 낮아졌다. 어릴 때 할머니가 거친 손으로 배를 쓸어 주며 ‘할미 손 약손’ 주문을 외워주면 아픈 것도 잊고 스르르 잠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제 할머니 약손은 그저 위로가 아니라 과학적으로 밝혀진 통증 치료방법이라는 게 증명이 되었다. 또한, 여자가 아플 때 남편이 아내의 아픔이 크다고 느낄수록 아내의 통증 수준이 내려가는 것 또한 과학적으로 측정되었다. 즉, 남편이 ‘많이 아프구나, 힘들겠다’라고 공감할 때, 아내의 통증이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줄어들었다는 말이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거나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이 그냥 말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팩트’는 공감의 효과는 작은 위로에서 고통의 회복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것이다. 


공감을 설명하는 다양한 접근이 있으나, 그 접근들이 내포하고 있는 내용은, 공감이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실존의 필요조건, ‘관계’를 몸으로 느끼게 해주는 소중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인간관계가 점점 취약해져 가는 시점에서, 결국은 각자의 공간에 들어앉아 각자의 고독을 위로해야 할 이 시점에서 공감의 중요성을 알았다는 것은 아쉽지만, 이제라도 그 감정의 소중함이 회자 된다니 다행이기도 하다. 


한국에 가면 출석하는 교회의 소식지 제목이 ‘함즐함울’이다. 로마서 12장 15절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에서 따온 줄임말인 것 같다.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이 단순한 일을 쉽게 하지 못해서 연구결과나, 인간 조건을 들먹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우리의 모자람이 처량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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