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그날은 무척이나 더웠다. 그녀가 만나자고 한 장소는 다 쓰러져가는 공원 한구석이었다. 그녀는 나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앉아 있었다. 발끝으로 흙을 긁으며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도 덥지?”
그녀가 나를 보고 말했다. 매번 이런 식이다. 그녀는 빛을 받으면 짜증스럽게도 더 빛을 발했고, 그러면 난 다시 넋이 나갔다.
“아니요, 그냥…”
“앉아.”
나는 그녀 옆에 앉았다. 그녀는 내내 하늘만 바라봤다. 별말을 하지 않아도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부담감 따위는 없었다. 그러니까, 나는 바닷가의 모래알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밀려오는 파도였다. 그녀가 내게 훅하고 오면 나는 아무런 저항 없이 쓸리고 무너지고 그녀에게로 잠식됐다. 그녀가 가만히 있으면 나도 아무런 미동 없이 가만히 그 고요를 즐길 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내게 모든 것이 되어갔다.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위험하다는 걸 알았지만, 이성 같은 것은 별로,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태양이었나. 직접 보면 눈이 멀지만,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것. 뭐가 됐든 그녀는 이미 거대한 세상이었다. 세상은 지겨운 자연이었다.
그녀와 나는 길거리를 끝없이 걸었고, 카페에 앉아 얼음을 입에 물고 시간을 보냈다. 말은 많지 않았지만, 그런 시간이 좋았다.
“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한 번은 그녀가 물었다. 그때 우리는 하천 옆을 걷고 있었다. 물은 미지근했고, 풀잎 사이로 하루살이들이 날아다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는데, 그건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태어나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힐끗 보더니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었다.
“꿈이 없는 게 나쁜 건 아니야. 하지만 좀 심심하잖아.”
그녀의 말이 뼛속까지 막혔다. 그리고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온몸을 흔들었다. 오로지 그녀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꿈꾸고 싶었다. 아주 행복하고 달콤한 그런 꿈. 이왕이면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그런 화려한 꿈을 꿔서 그녀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어느덧 여름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 계절감을 살 또는 뼈로 느끼고 있었다. 바람이 바뀌었고, 매미의 울음이 허전해졌고, 우리는 자주 키스했다.
“나 이제 여길 떠날 거야.”
그녀는 무심히 말했다.
“어디로?”
“멀리.”
“나 꿈이 생겼어.”
“뭔데?”
“시인”
“재밌네, 그리고 잘 어울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한참을 웃었다. 참 맑게, 해맑게 웃었다.
“떠날 거야? 정말?”
너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시인이 되기로 했다는 것을 그리고, 너를 위해 내가 그린 미래를 당장이라도 머리를 잘라서 뇌를 펼쳐 보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야 해.”
“왜?”
“그래야 하니까.”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그녀가 그 말을 끝으로 눈물을 흘리며 내 품으로 안겼기 때문이었다. 매미가 울고 있었다. 그녀도 울고 있었다. 나만 울지 않았다. 그건 두려움이었을까. 그녀를 전부 안으면 익사할 거라는 공포. 또는 실명할 거라는 공포. 그런 나약함이었을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하지만, 내가 그녀에 대해서 아는 건 별로 없었다. 그녀가 어디서 살다 왔고, 학교는 어디를 다니고, 평소에 무엇을 하며 보내는지. 정말 난 그녀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도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던 것이 우습게 생각되지 않았던 건, 그만큼 그녀가 아름다웠던 탓이었고, 그때도 햇빛이 그녀를 기어 다니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