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그녀는 평소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곁에는 기스 자국이 많이 난 캐리어 하나가 있었다. 캐리어가 얼마나 크던지 그녀 몸의 절반은 족히 넘어 보였다. 그 캐리어가 지난날 그녀의 과거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캐리어로만 봤을 때 그녀는 남극 사람이었다.
“잘 지내.”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울컥 치밀어 오르는 걸 꾹 삼켜야 했다. 그녀는 나를 한 번 바라보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여름 태양 아래로 걸어갔다. 그녀는 고작 나보다 한 살 많았으면서도 어른스러운 척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고작 그때 스물하나였다. 차오르는 감정을 다루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니 나는 참을 수 없다. 그대로 달려가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그녀는 내가 닿기 전부터 이미 울고 있었다. 펑펑 또는 맴맴
그 순간 도서관에서 들었던 발 자국 소리가 귓가에서 울렸다. 뚜벅뚜벅 뚜벅뚜벅. 그을린 수염자국, 짙은 다크서클에 흰 백발 머리. 어딘가 시큼한 오줌 냄새가 날 것 같은 사람이었다.
“아빠.”
그녀의 아버지란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를 슬쩍 보고는 그녀에게 귀찮다는 듯 두어 번 손짓이 전부였다. 그녀는 눈물을 급하게 닦고는 내게 미안하다 사과했다. 돌아선 그녀는 반쯤 캐리어를 들다가 놓고 내게 키스를 했다. 그 순간 작은 희망을 품었지만, 그녀는 결국 떠났다. 나는 그대로 서 있기만 했다.
그녀가 떠난 이틀 후, 비가 왔고 여름이 끝났다. 매미가 한순간 사라졌다. 나무 사이로 부서지는 햇빛은 어느덧 가을을 품고 있었다. 그녀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내 마음 어딘가엔 여전히 여름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와 웃음, 그리고 그 눈부셨던 그 순간들.
사랑은 연속성을 지닌다. 전부 부서지고 무너지고 지나간 후에도 사랑은 발화한다. 나는 오늘도 그 여름 도서관을 떠올린다. 그녀가 서 있던 그 자리를, 그 눈부셨던 순간들을.
그녀는 어디에 있을까. 그녀도 우리가 함께했던 그 여름을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나만이 이 계절에 갇혀 있는 것일까.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이미 전부 지나간 것들이다. 다시 한번 더 운명이 내 무능함을 용서해 주지는 않을까 했던 시간도 있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저 계절이 자연히 오듯 그녀가 떠오르면 맴 맴 하고 울어버릴 뿐이었다.
올해 여름은 지겹게 더웠다. 매미가 그 지겨움을 더 지겹게 더 해주려 삼창 중이었다.
맴 맴 맴
맴 맴 맴
우는 소리 사이, 이상하게 그리고 또 어딘가 익숙하게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뚜
벅
.
"................."
그런 뻔한, 여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