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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향기 Oct 20. 2023

친정아빠의 새로운 취미

특별한 소통법


가끔씩 서로 안부를 묻거나 누군가 공지를 올릴 때만 울리는 친정가족 단톡방이 요즘 바쁘다. 눈팅만 하셨던 친정 아빠가 뜬금없이 카톡에 글을 올리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아빠는 언제 카톡에 글을 올리는 방법을 깨우치신걸까. 몇 마디 안되는 짦은 글이지만 아빠의 글은 어딘가 특별했다.


"남산봉 푸른 숲이 내 마음에 아름 안고

영주산 초가을 산들바람이 허리를 스치고

한라산 먼 들녘 풍차가 한가로이 소용돌이치네.

자연이 준 아름다움에 잠시 매료되는구나..."

- 저녁 운동 중 농장 앞 길을 지나며.... 아버지가 -


 카톡으로 받기엔 어딘가 어색하면서도 오글거리는 글이었지만 아빠가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보내셨는지 짐작이 되었다. 아빠는 산책길에 가을 문턱에 접어든 제주 자연의 아름다움에 푹 빠져든 것이리라. 그 감정을 자식들에게 전하고 싶으셔서 돋보기안경을 쓰시고 서툰 솜씨로 핸드폰 타자를 한 자 한 자 누르시는 모습이 그려졌다.


 요즘 글을 쓰면서 적당한 단어를 떠올리는 것도 몇 마디 문장을 쓰는 것도 쉽지 않아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곤 한다. 사무직으로 살아 온 나조차도 힘든데 아빠가 안쓰던 글을 쓰시면서 애쓰셨을 것 같아 답장을 해드렸다.


 "제주는 벌써 초가을 바람이 부는군요! 자연과 벗삼은 아빠의 산책길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아빠는 카톡 글에 자식과 사위와 며느리의 반응을 보는 게 재밌으셨는지 잊을만하면 또 올리셨다. 어떤 날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사진과 함께, 어떤 날은 파란 하늘 아래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피어난 사진과 함께,  또 어떤 날은 몇 해 전부터 친정집에 눌러앉아 살고 있는 강아지 소식을 재미나게 올리셨다.


 아빠 글에 고향 향기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가을가을한 시골 풍경이 담긴 사진을 보니 도시에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내 마음에 온기가 흘렀다. 문학소년 같은 풋풋한 아빠의 글 덕분에 한동안 빙그레 웃는 날이 이어졌는데, 어느 날은 글 분위기를 180도 바꾸어서 올리셨다. 고향 소식을 뉴스기사 형식으로 전해오셨다.


......................

"속보"

6일 아침 농장 앞으로 진입하던 중 길목에 노루 사체가 발견되었다.

들개들의 소행이겠지. 개들의 포획 흔적이 남아 있다.

노루 개체수가 줄어들겠지... 이상!

......................


 사무실에서 무미건조하게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빠의 카톡 글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났다. 자식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주려고 분위기를 바꿔보신 것이리라. 서울에 있는 큰오빠도, 제주에 있는 언니와 작은오빠도 동시에 피식 웃고 있을 것 같았다. 사위, 며느리, 딸들, 아들들 차례대로 답글이 올라왔다.


 아빠 카톡글에 답글을 달다가 가족간에 서로 안부를 묻고 함께 고향을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뿔뿔히 흩어졌던 가족이 아빠덕에 카톡방에 한데 모였다. 아빠는 늘 우리 가족 소통의 중심이셨다. 어릴 때부터 아빠는 자식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하셨다. 우리 남매는 아빠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자랐다.


 아빠는 고집이 있긴 하시지만 고리타분하진 않으시고 감정표현에 솔직하신 편이라 이야기를 나누면 재밌다. 내가 어릴 때도 아빠와의 추억이 많았는데 손자손녀들에게도 재밌는 이벤트를 많이 해주셨다. 여름이면 손전등을 들고나가 장수풍뎅이도 잡아주시고 명절날엔 윷놀이판을 손수 만들고 특유의 유머로 게임을 진행해주셨다. 아빠 덕분에 먹고사느라 무미건조하고 빡빡하게 돌아가던 시간 속에 웃음이 날 때가 많았다.


 이제 아빠는 카톡 글쓰기로 말이 없는 사춘기 손자도 웃게 한다. "할어버지, 왜 이런 글 올리는 거야?^^ 뭔가 너무 웃겨!!"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손자 손녀들도 남다른 할아버지의 감수성을 이해하는 듯하다. 아빠 글은 우리 가족을 웃음짓게 한다. 자식은 물론 사위와 며느리와 손자에게도 잘 보이려 애쓰지 않고 권위를 부리지도 않으시고 마음가는대로 솔직하게 표현하시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 아빠와 통화하다 물었다.

"요즘 카톡에 왜 글 안 올려요? 독자가 기다리고 있어요!"

아빠가 반가운 듯 웃으시며 알았다고 대답하셨다. 조만간 또 아빠 덕분에 웃음짓게 되는 날이 올 것 같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늘 그랬던 것처럼 우리의 중심이 되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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