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도 온전하지 못한 양반이 그렇게 널 찾는단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말에 미안함이 잔뜩 묻어 있다.
“그럼. 당연히 가 봐야지.”
아이 방학에 맞추어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에 함께 가기로 하고 전활 끊었다.
어느 여름 방학때인가.
지금의 내 아이보다 내가 더 어릴때, 하루종일 땡볕 아래에서 놀다 할머니 집으로 들어와 티브이 앞에 앉았다. 동생과 내 앞으로 엎드려 방을 닦으며 지나가는 할머니의 큰 엉덩이와 축 늘어진 젖 살들을 보고.
“할머니 젖이 바닥에 닿겠어” 하며 푸하 하고 웃었다.
할머니는 멋쩍게 웃으며 자세를 고쳐 앉는다.
“할머니가 늙어서 그래”
“늙는게 뭐야?”라는 내 물음에,
할머니는 “늙는건… 슬픈거야“ 라고 대답했다.
아직 늙는 것도, 슬픈것도 모르는 나는 딴청을 피웠다.
할머니는 몇년 후 유난히 다정했던 막내아들을 갑작스러운 사고로 먼저 보내고, 또 할아버지를 보내면서 더 늙고, 더 슬퍼졌다.
할머니 집에 갔던 그 여름처럼 태양이 유난히 뜨거운 빛을 내던날 할머니가 계신 곳으로 갔다. 시골길 따라 한참 차를 몰고 가면서 왜 이리 할머니집은 항상 멀까. 생각했다. 시골마을 작은 폐교앞에 자리 잡은 그곳이 이젠 할머니 집이라고 했다. 건물 현관 앞에서 실내화로 갈아신고 사무실이라 적혀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 앉았다.
조금있다가 휠체어에 앉은 마른가지 같은 할머니가 들어온다. 엄마가 할머니와 눈을 마주치려고 고개를 할머니 얼굴 앞으로 들이밀며, “누군지 알겠어요? 하고 묻자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인다.
일어나 덥석 잡아본 할머니의 손이 너무 하얗고, 가늘어서 어색했다. 내가 좋아하는 인절미와 고구마를 바구니에 잔뜩 쌓아 놓던 손, 넘어져 상처난 내 무릎에 된장을 올려놓던 그 손이 아닌, 이젠 혼자 숟가락도 들어 올리지 못하는 무용해진 손을 보니 내 할머니가 아닌것 같아 눈물이 났다.
엄마는 직원에게 “요즘은 어때요?”하고 물었고, 직원은 요즘은 더 심해져 욕도 많이 하고 가끔은 꼬집고 때리기까지 한다고 했다.
직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엄마가 할머니를 본인 앞으로 잡아 당겨 “엄마, 사람 때리고 욕하면 안돼”하고 아기에게 가르치듯 다정하게 얘기한다.
그 말을 듣는 할머니 눈은 다른곳을 보고 있다. 나를 보는 것도 엄마를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벽을 보는 것도 아닌,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 꿈속에 있는 것 같은, 이 세상이 아닌 다른곳에 있는 눈이다.
엄마의 간절한 당부에도 딴청을 부리는듯한 멀뚱한 눈에 그만 풉 웃음이 나올뻔했다.
할머니의 눈은 ‘절대 니 말 안들을 거다. 나는 이제 내 마음대로 살란다’ 하고 있었다. 그 눈은 아마 자신을 보고있는, 자신만 보겠다는 다짐의 눈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잘 모른다. 다만 어린나이에 시집와 장사꾼이었던 할아버지가 몇일에 한번 들어왔다 나가도 시부모님, 자식뻘의 시동생들, 그리고 줄줄이 태어난 본인 자식들까지 먹이고 기르고 가르쳤다는 것 밖에. 아마 앞으로도 나는 할머니에 대해 모르겠지만, 할머니가 본인이 원하는걸 마음대로 하고 살지 못했다는건 알수 있다.
나를 보는데, 나를 보고 있지 않는 할머니 눈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말했다.
할머니, 늙으면 슬퍼진다는 할머니 말은 틀렸어.
늙으면 맑아져.
할머니는 알수없겠지만, 난 할머니가 맑고 투명해지는걸 봤어.
그러니까. 욕도 하고 싸움도 하는 할머니로, 할머니 하고 싶은데로 하는 그 모습 그대로 조금만 더 우리 곁에 있어 주세요.
하고 여러번 기도했다.
엄마는 준비한 간식들을 직원들 앞에 내어놓고, 아빠는 얇고 짧은 본인의 연들을 억지로 끌어내고, 할머니를 잘 돌봐달라는 부탁을 더해 놓고는 엉덩이부터 문을 열고 나오며 몇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건물을 나와 우리는 본인이 살고 있는 집인데도 어쩜 한번도 걸은적 없을 것 같은 (지금)할머니집 마당 벤치에 앉아 아이가 땡볕아래에서 땅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한참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