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의 흐름에 따라..
비가 내린다.
오늘 골프를 너무 못 쳐서 상심이 컸는데, 비가 오는 덕에 막걸리를 마시며 상심을 달래 본다.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괜히 음악이 듣고 싶어진다. 괜히 분위기 잡는 노래가 듣고 싶어 조성진이 연주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틀었다. 정말 좋지만 한 20초쯤 듣다 보니 그만 듣고 싶어진다. 그래서 명곡 중의 명곡 B.J. Thomas의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를 틀었다. 음.. 너무 좋다. 이 노래는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가 않는다.
이 노래는 한 10살쯤 처음 들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 어느 집에나 흔히 있던, 그럴싸하지만 막상 쓰지는 않아 마치 인테리어 소품이 되어버린 전축이 우리 집에도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그 전축을 가지고 놀고 싶었다. 일단 벽에 있던 CD를 마구 꺼내서 전축에 넣고 잠깐 들어보고 다음 곡으로 넘어가고를 반복하였다. 마치 방금 빗방울 전주곡을 20초도 채 안되어 끄고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를 튼 것처럼.
그렇게 마구잡이로 듣다 보니, 하나같이 내 마음에 드는 노래들로만 가득 찬 cd를 발견했다. 그 cd에는 hey jude, let it be를 비롯한 유명한 올드팝과 지금 듣는 이 노래, rain drops keep falling on my head가 들어있었다. 그 cd의 음악 중 나는 이 노래를 제일 좋아했다. 그때는 알파벳도 잘 몰라서 이 제목의 뜻조차 몰랐는데 어떻게 이 음악이 그렇게나 좋았는지 모르겠다.
그 이후 심심하면 거실에 소파에 편하게 앉아 전축을 켜고, 이 노래가 들어있는 그 cd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그만 좀 들어라' 하는 엄마의 잔소리가 피곤해지기 전까지..
한편, 그 시절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정확히는 비 오는 날 자체보다는 비 오는 날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면서 노는 게 너무 즐거웠다. 산성비가 몸에 안 좋다고 뉴스나, 학교에서나 수도 없이 들었지만 그때의 나는 잼민이 보다 아마 수십 배는 말을 안 듣던 아이였다. 그런 나는 비 오면 더 신나서 친구들과 나가서 실컷 뛰어놀고 흙탕물을 잔뜩 뒤집어쓰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이 또한 엄마의 잔소리가 슬슬 피곤해지면서 비 오는 날 나가서 노는 걸 그만두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중고등학생 때는 비 오는 날을 그렇게 반기지 않았던 것 같다. 옷이 젖는 것도 찝찝했고, 점심시간에 나가서 축구도 못하고, 무엇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던 체육시간은 자습시간으로 바뀌어하기도 싫은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 오는 날에 별 좋은 감정이 없다가 다시 비 오는 날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있다.
20대 초반이었다. 한창 사랑에 눈뜨기 시작할 때, 나에게 여러모로 큰 영향을 준 한 이성이 있었다. 어느 추운 겨울날이었다. 데이트를 하다가 시간이 늦어 돌아가는 버스가 끊겼다. 택시를 타야 하나 하고 같이 고민하다가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그냥 우리 걸어가자"
그렇게 걸어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겨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연히 우산은 없었고 '우산을 어디서 사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던 찰나에 그분이 이렇게 말했다.
"저기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빗줄기가 너무 이쁘지 않니? 그냥 우리 비 맞으면서 돌아갈래?"
그날 그분과 같이 바라보던 가로등 불빛아래 비치는 빗줄기는 정말 이뻤다. 그리고 그날, 그 분과 비를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한 시간 남짓한 짧고 강렬한 시간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 가끔 떠오르곤 한다.
그날 이후로 비 오는 날을 다시 좋아하게 된 것 같다. 보통 남들은 비 오면 집으로 들어가는데, 나는 반대로 비가 오면 마치 습관적으로 밖으로 나간다. 비 오는 날 건물 현관에서 우산을 펴고 비 아래로 내딛기 전에 나는 설렌다. 우산 위로 우두두두 떨어지는 빗소리가 너무 좋기 때문이다. 처마 아래로 비가 일렬로 떨어지는 모습도 너무 예쁘다. 그렇게 비 오는 모습을 보다가, 우산 아래서 걷다가 가로등이 보이면 괜스레 한번 가로등 불빛에 비치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그러고 이런저런 생각과 감정에 젖어 다시 걷는다.
그것들이 지루해질 때쯤 기분을 내기 위해 귀에 이어폰을 꽂는다. 비가 올 때 듣는 많은 음악들이 있지만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는 빼놓지 않고 듣는다. 그런데, 나는 수백 번도 아니 천 번보다 더 들었을 이 노래의 가사를 잘 모른다. 그냥 비 오는 날에 어울리는 멜로디를 따라 흥얼거리다가 raindrops keep falling on my head만 속으로 신나게 따라 부를 뿐이다.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유튜브뮤직이 Frankie Valli의 Can't take my eyes off you를 틀어준다. 이 노래의 끈적한(?) 분위기는 묘하게 비 오는 날의 촉촉함과 어울린다. 이 노래의 가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You're just too good to be true, Can't take my eyes off you'
해석하자면,
'그대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워요. (그래서) 그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인 것 같다.
로맨틱하지만 닭살 돋는 가사이다. 노래를 들으며 내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는지 돌이켜본다. 2년이 훌쩍 넘은 것 같다. 가물가물한 것 보니 혼자 지내는 게 편하고 익숙해졌나 보다. 하지만 요즘 들어 가끔 다시 연애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만일 다시 연애를 시작한다면, 위의 노랫말처럼 '눈을 뗄 수가 없을 정도로, 믿기지 않게 아름다운 여성'과 연애를 하고 싶기는 하다. 그리고 그분도 나처럼 비 오는 날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