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번이 미끄러지는 델프 B2라는 문턱
생테티엔을 뒤로한 채, 치를 떨며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프랑스어 공부를 재개했다. 그때는 다시 프랑스에 유학 갈 생각을 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어학하고 난 게 좀 아까웠던 것 같다. 나는 한국에서 딸 수 있는 준학예사 자격증을 준비할 생각이었다. 이걸 준비해서 미술관에 들어가는 게 더 수월해 보였다. 처음의 유학을 계획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이, 프랑스에서 하는 것보다 한국이 훨씬 나을 것 같다는 합리화가 몰아쳤다. 그렇다고 공부만 할 수는 없었다. 아르바이트도 구해서 하루의 절반은 일로 보냈다.
인터넷 카페에 가입해서 사람들이 준학예사 자격증을 어떻게 공부하는지 찾아보았다. 종합해 본 결과, 서양미술사 과목을 위해 고대부터 현대까지 총망라해 놓은 한 두 권의 책을 공부하는 식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아직 그래도 '제대로' 공부를 하겠다는 마음이 있었다. 그걸로는 전혀 충분할 것 같지 않았다. 아니, 한 두 권의 책 가지고 시험까지는 통과하더라도 현장에서 제대로 알고 일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물론 그렇게 공부해서 학예사가 된 사람들을 비하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들도 절대 책 한두 권으로 공부를 끝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때 나는 그냥 또 당시의 현실을 피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치기 어린 마음으로 벌써 생테티엔의 악몽을 다른 도시로 닦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프랑스어 공부에만 집중했다. 준학예사 자격증은 집어치웠다.
나중에 주변 지인이 학예사 자격증 시험을 보고 와서 나에게 '샤를마뉴(Charlemagne)'가 뭔지 아냐고 물었다. 프랑스 대학에서 유학한 이후였으니 당연히 나는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생각보다 시험 레벨이 많이 올랐다고 느꼈다. 이제 진짜로 책 한 두 권 가지고는 택도 없겠구나. 아마 예전에 사람들이 본다는 그 필독서에 시험으로 출제된 부분의 내용이 담겨있는지 조차 모르겠다. 어쩌면 그 당시에 자격증을 따는 게 옳았을지도 모른다.
프랑스어는 과외로 수업을 받았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친구 같은 프랑스 교포 여성이었다. 수업은 일상 이야기들을 더불어 느슨하게 진행되었다. 어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이 선생님과 수업을 조금 진행하고는, 그다지 어렵지 않게 프랑스어 능력 시험인 델프(Delf) B1을 땄다. 아직 어학연수의 여파로 겁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프랑스어를 뱉어낼 수 있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한다. 문법은 난장판이었을 거다. 그 이유로 다음 단계인 델프 B2는 정말 정말 따기가 어려웠다. 대학에 지원하려면 최소 B2가 필요했다. 나름 공부를 붙잡고 있는 것 같은데 왜 안되지? 싶었다.
델프 B1을 따고 몇 개월 더 준비한 뒤 델프 B2를 치러 시험장에 갔을 때였다. 결과를 먼저 말하자면 이 시험은 떨어졌다. 하지만 시험 결과를 나는 이미 시험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알고 있었다. 왜냐면 구술시험의 시간이 아주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구술시험은 현재 사회적 문제가 되는 이슈들 중에 주제를 랜덤으로 뽑아서, 그것에 대한 내용을 두 명의 감독관에게 정리해서 발표하고, 그들과 질답을 나누는 식으로 진행된다. 프랑스어를 떠나서 내용을 무얼 말해야 할지 완전히 막혀버렸다. 어떤 말도 이어나갈 수가 없는 나는 생방송에서 사고라도 낸 방송인처럼 굳어버렸다. 아니, 이 이슈에 대한 해결책을 내가 알고 있으면 여기서 프랑스어 시험이나 보고 있겠습니까? 해결책을 계속해서 말해보라는 감독관들에게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었지만 내 마음의 소리는 그러했다. 두 사람은 서로 각각 노트에 뭔가를 체크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내가 시험을 마무리 짓고 인사하고 일어나니 "그녀는 안 되겠어."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제대로 말하지 못한 걸 알지만, 그래도 속상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의 추천으로 과외 선생님을 바꾸고 나서야 내가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고 있음을 깨달았다. 새로운 선생님과 수업을 하면서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내 프랑스어에 매달려 있는데도 그가 내준 숙제를 단 한 번도 다 해간 적이 없었다. 나는 내 최고의 성실함으로 했는데, 숙제를 매번 안 해오는 학생이 되었다. 나의 최선이라고 피력해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렇게 성실의 정도가 다를 수 있구나 싶었다. 진작 여기로 왔어야 했는데.
한국에서는 델프 시험이 연간 3회밖에 열리지 않아서 그 선생님과는 연말에 있는 TCF라는 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TCF-DAP이라는 대학 입시가 가능한 다른 종류의 시험이었다. 여기에서는 문법과 어휘 파트는 객관식이고, 쓰기 시험이 있었다. 선생님과 함께 두 달쯤 공부하고 나서 이 시험을 보게 되었는데, 쓰기는 목표점수인 10점 이상으로 B2 레벨이 나왔다. 내가 혼자 준비한 파트는 B1 레벨로 떨어졌다. 사실 준비랄 것도 없었다. 쓰기 숙제에 맨날 시달려서 따로 문법 공부를 할 시간이 없었다. 두 파트 모두 B2가 나와야 했기 때문에 그 해에는 바로 대학 지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먼저 델프 시험을 떨어지고 나니까 TCF-DAP의 탈락은 별로 충격도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내내 탈락의 고배를 마시며 B2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