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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UA Oriental Art Oct 22. 2023

대유럽 수출용 도자기의 시작

유럽 사치품 시장의 수요와 해상실크로드의 부활


실크로드를 통해 도자기를 운반 중인 투르크멘, 14~15세기 Photo by Dick Osseman


 위 그림은 중국과 중동 가문의 결혼식 예물인 도자기가 운반되는 모습을 그린 작품입니다. 당시 중동 상인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 국제 교역에 중개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중국도자기는 과거 대표적인 국제무역품이었습니다. 수 세기동안 동서양 간 가장 빈번했던 교역 루트는 육상실크로드 였습니다. 하지만 육상실크로드는 비용 시간 등 여러 면에서 효율적이지 못했으며, 이 같은 단점들은 더 빠르고 직접적인 교역 루트인 바다를 통한 무역로가 더 각광받게 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청 강희제의 남방 실사 항해 투어, 중국고궁박물관, 1662-1795, 청 왕조


14세기 명나라는 다른 나라와 무역을 금지하는 '해금 정책'을 취했습니다. 그러나 도자기에 대한 서방의 수요는 계속 커져갔고, 청 강희제 집권 당시 동서양 무역은 다시금 화려하게 부활했습니다. 강희제 집권 초기 기존 해상무역을 금지하는 청 왕조의 정책과 명 왕조로부터 이어진 조공 정책에 대한 회의적인 움직임은 해상무역의 급부상과 맞물려 새로운 국면을 맞았습니다. 1684년 강희제는 300년간 금지되었던 사무역에 대한 규제를 없애고해외 무역상들이 중국 항구를 자유롭게 왕래하고 중국 무역상 또한 해외로 출항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이 결과 해상 무역은 다시금 번성하게 되었습니다. 


정책이 바뀌자 유럽 상인들은 너도나도 도자기를 구하기 위해 중국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당시 도자기 무역의 선두는 포르투갈이었고, 이들이 개척한 대서양 항로를 통해 중국 도자기가 유럽에 대량으로 유입됐습니다. 이후 17세기 네덜란드가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신흥 해상 강국으로 부상하면서 도자기 무역의 주도권은 네덜란드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1706년 완공된 독일 베를린에 있는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의 "도자기실"


유럽에서 중국 도자기가 식기 용도를 넘어서 부유함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유럽 왕족과 귀족들은 중국 도자기를 경쟁적으로 수집해 궁전이나 자신의 집을 장식했습니다. 고급 중국 도자기 컬렉션 수준이 당시의 부의 척도를 나타냈습니다. 당시 유럽에는 도자기를 만드는 데 적절한 흙을 구하기 힘들었고, 유럽에서 생산된 그릇들은 강도가 약하고 액체를 보관하기 어려워 품질이 뒷받침되는 중국 도자기는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해외 수출용 도자기들은 중국 내에서 사용되던 도자기들과 형태 크기 문양 등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유럽, 중동 부호들의 기호를 만족시키기 위해 작품 특성을 맞춘 결과 크기가 크며 화려하고 해당국가가 요청한 문양이 도자기에 반영되었습니다.


독일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의 "도자기실" 그림


중국 도자기의 가치가 유럽 전역에 알려지면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배들은 1년에 10만 점 넘는 중국 도자기를 네덜란드로 실어 날랐습니다. 1602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도자기를 주문하고 운반하는 역할을 맡았었고, 현재 발굴된 까마우(Ca Mau) 해저 선박과 벙따우(Vung Tau) 해저 선박은 동인도회사에서 주문하고 운반한 예시 알려져 있습니다. 


17세기 말에는 영국 상선까지 도자기 무역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러한 도자기 수집 열풍의 영향을 받아 17~18세기 유럽에선 화려한 바로크, 로코코 양식의 미술에 중국풍 예술이 결합된 '시누아즈리(Chinoiserie)'라는 미술 사조가 크게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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