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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닿 Jun 20. 2021

이게 진짜 약 때문이라고? 의심하게 된다. - 2

무서운 스테로이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다.

혈육이 이전에 공황발작을 겪었다.

멀쩡하게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던 중이었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욕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단다. 그리고 숨을 쉬기 힘들었다고. 다행히 집 근처여서 서둘러 내려 거의 기듯이 걸어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며 현관 턱에 앉아 그리 말했다.

어느 날은 죽어야겠다. 살 가치가 없다며 머리를 쿵쿵 찧었다. 몸을 벌벌 떨고 눈물, 콧물, 침이 모두 흘러내리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쿵쿵 찧는 모습에 짙은 공포심이 몰려왔다.

 처음으로 119를 불렀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카들이 아비의 몸에 매달려 엉엉 울었다. 엄마 또한 네가 없으면 살 가치가 없다. 그런 소리 할 거면 같이 죽자며 울었다. 나는 뒷걸음질 쳐 그 장면을 한눈에 담는다. 너무나 비현실적인 장면이 내 현실이었다.

나에게 공황이란 이전까지 느껴보지 못한 공포였다.




 ‘어느 날 내 영혼이 빠져나갔다.’고 말했다.

 공황이 온 엄마에게는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책에서 비유적으로 쓰이던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몸’을 눈으로 본 순간이었다. 그때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 가득했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아득하고 지독한 공포심이 들이닥쳤는데 할 수 있는 것은 바라보는 일밖에 없었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엄마의 곁에 앉아 괜찮다고 무슨 걱정을 하는 것이냐며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엄마에게 하는 말인데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다음 날부터 아빠가 집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일주일 정도 시간을 보냈는데 엄마의 상태는 좋아지기는 커녕 점점 심해졌다.

 잠을 제대로 못 잤고, 내가 일어나기만을 기다리느라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아 멍하니 기다렸다. 나는 그것 또한 공포스러웠다. 원래도 아침이 썩 반갑지 않았지만 그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현장에 다시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눈뜨기가 싫었다.

 스트레스가 극심해졌다. 생각은 편협해졌으며 감각은 예민했다. 새로운 자극을 찾으러 손톱과 발톱의 가장자리를 뜯었다. 얇은 손발톱은 나의 집념에 깨지고 부러지고 피가 났다.

 피가 나도 아픔은 잠깐이었다. 시원했다. 막혀 있는 혈들이 도는 느낌. 멍하니 피가 나는 것을 본다. 더 나오지 않을까 쥐어짠다. 핏방울이 동그랗게 맺히다가 터지며 손톱이면 손톱, 발톱이면 발톱을 감싸면 그제야 무감각하게 휴지를 뽑아 피를 닦는다.

 스트레스가 쌓이면 어김없이 그랬다. 오랜 습관이자 일종의 자해라고 생각한다.

 고쳐야 하는데. 그 기이한 ‘시원함’ 때문에 놓을 수 없다는 것이 불건강하다는 지표가 아닐까.




 엄마의 증상은 나아지기는커녕 점차 심해졌다. 잠시의 산책이라도 나갈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10분도 밖에 나갈 수 없을 만큼 불안정했다. 산책 가자고 잡아끌면 어린아이처럼 현관문 앞에서 엉덩이를 쭉 뺀다. 가기 싫다고. 못 간다고. 너무 무섭다고. 그렇게 또 벌벌 떨었다.

 엄마를 혼자 두고 나갈 수 없기에 집안에 감금되어 있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버텼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미 이성과 비이성이 한 곳에 뭉쳐 엉켜버린지는 오래되었고, 스트레스로 인하여 식욕을 잃었지만 폭식했다. 입에 쑤셔 넣고 있지 않다면 무엇인가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 ‘무엇’은 아직 찾지 못했다.

 기억이 사실 잘 나지 않는다. 나는 매일 짜증 냈고 엄마는 죽고 싶어 했다.

 엄마는 우울한 자신 때문에 내가 죽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족쇄가 된 자신이 죽으면 내가 해방될 것이라는 기이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절정은 그날이었다.

 아침부터 엄마가 힘들어했다. 서울 병원에 가는 날이 가까워지는 날이었다. 나의 짜증 섞인 재촉에 병원으로 전화를 걸었다. 증상을 말하면서 엄마의 상태가 점차 심각해졌다. 말소리가 점차 줄어들고 떨리기 시작하자 선생님께서 “곁에 누구 없어요?” 했고 나는 전화를 건네받았다.


 “공황 상태인 것 같으니 서울로 올 수 있어요?”


 못 간다고 했다. 차를 타고 편도로 4시간 걸리는 서울을, 발작 직전인 엄마가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지금 빨리 119 불러서 가까운 정신과 있는 병원으로 가세요. 환자분 그냥 놔두면 안 돼요. 큰일 날 수 있어요. 지체 말고 빨리요.”


 공황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예측하고 있었지만 확답을 받는 것은 어쩐지 무엇인가가 쿵하고 내려오는 기분이라서. 벌벌 떨고 있는 엄마가 옆에 있기에 최대한의 이성을 붙잡고 “네. 네.”만을 반복했다. 서둘러 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황을 설명하자 아빠가 병원 갈 준비를 하고 내려오라고 했다.

 늘 그렇듯 병원을 못 간다고 엄마는 벌벌 떨었다. 무릎을 세우고 양팔을 구부린 채 가슴 쪽으로 모아, 마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린 채 못 간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런 상태로 계속 있으면 안 된다고. 병원에 가서 정신과 진료를 받아 보자고.  


 억지로. 정말 억지로 엄마를 이끌어 차에 태웠지만 발작이 시작되었다. 보조석에 앉아 있는 엄마는 차 세우라고 울부짖었다. 못 간다고. 더럽다고. 더러움이 옮을 것이라고. 집에 가자고 울었다. 당신이 마치  바이러스라도 된 것처럼 모두에게 해를 입힐 것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있었다.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빠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엄마는 뛰쳐나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내가 막았다. 119에 전화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엄마 또한 그 소리를 듣고는 나가서 너네 아빠 좀 말려보라고 나를 재촉했다.

 곧 구급차가 도착했고, 엄마는 더 공포에 질렸다.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예요.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모두를 더럽힐 거예요. 등등의 말들을 내뱉으면서 엄마는 덜덜 떨었다. 병원으로 가는 거다. 엄마를 치료하러 가는 거다. 아무 일 없을 거다. 말을 계속해 건네도 아무런 소용없었다. 조금 괜찮아 진 것같아도 뒤이어 집에 가자는 말이 되돌아 나왔다.

 병원에 도착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는데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인지 입원이 불가능했다. 그 소식에 아빠는 엄마를 서울로 데려가기로 마음을 잡은 듯했다. 응급실에서 처방받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잠든 것처럼 보이는 엄마를 데리고 그렇게 서울로 떠났다. 




 하루에 일어난 일이라고, 그것도 고작 4시간 만에 일어난 일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진이 다 빠졌다. 현관문 앞에 쓰러져 신발도 채 벗지 못하고 잠들었다.


 알고 보니 이전에 처방받은 수면제가 스테로이드와 맞지 않아 환각과 각성 상태를 유발했단다.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은 엄마는 이후로 이모네에 일주일간 머물면서 놀랍게도 호전된 상태로 돌아왔다.

 2달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해서 항우울제와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복용했고 스테로이드도 한 알 줄었다. 부작용이 겪기 이전의 상태와 똑같은 안정된 상태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여전히 약 없으면 밤에 못 잔다.

 나 역시 여전히 엄마가 잘 자기를 매일 밤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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