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에 없는 경면(黥面) 시행
1. 형조판서 안숭선의 활약
세종 18년 6월 14일에 형조판서 신개가 임금에게 올린「도둑방지종합대책(안)」에는 얼굴에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경면(黥面)도 들어 있었다. 사면된 전과까지 합해서 절도 3범이면 사형에 처하는 대신 단근형이나 경면형에 처하자고 하였던 것이다(세종 17년 6월 14일).
경면도 또한 단근과 마찬가지로 아득한 옛날에 중국에서 노예와 평민들을 억압하는 데 사용되다가, 한(漢)나라 문제 때 폐지된 육형(肉刑)이었다. 따라서 《대명률》은 물론이고 조선에서 편찬한 《경제육전》과 《속육전》에도 없는 법외 형벌이었다. 그런데 갑론을박 끝에 처음에는 단근만 채택하였다가, 날이 갈수록 도둑이 늘어나자 8년쯤 뒤에 단근을 중단하고 경면을 시행하였다.
1443년(세종 25) 1월 중순경 임금이 안숭선을 형조판서로 앉히니, 한 달이 채 안 되어 형조에서 도둑방지를 위한 특별대책을 올렸다(세종 25년 1월 11일, 2월 5일). 변방에 들여보낸 절도범들의 자립을 지원하는 정책이 성과는 없고 심각한 문제들만 야기되는 실상을 낱낱이 아뢰고 나서, 발의 힘줄을 끊는 단근보다 얼굴에 먹물로 죄명을 새기는 경면을 시행하기를 청한 것이다.
안숭선은 경면의 효과는 확실할 것이라는 논리로 임금을 설득하였다. 형벌을 가중하지 않으면서 도적을 잡고 도적질을 방지하는 데는 경면만한 것이 없다며 윤허해주기를 청했다. 얼굴에 죄명을 새기면 도망을 치더라도 숨을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못된 버릇을 버리는 자가 많을 것이라고 하였다.
옛날의 제도를 살펴보면, 삼대(하·은·주) 이전 시기는 풍속이 순후했는데도 육형을 썼습니다. 송(宋)나라 때 주자가 말하기를, ‘노역이나 유배만으로는 도적을 막을 수 없으면 생식기나 뒤꿈치 힘줄을 자르는 형벌을 쓰라.’고 하였으니, 두 경우 모두 사형 대신 육형을 택했다는 점에서 생각이 깊었다고 하겠습니다. 경면은 팔뚝에 자자하던 것을 위치만 얼굴로 옮기는 것이니 형을 가중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얼굴에 먹물로 죄명을 새기면 도망치더라도 표시가 분명해 몸 둘 곳이 없어져 부끄럽게 여기고 허물을 고치게 될 수도 있으니, 도적을 잡고 도적을 없애는 데는 이보다 나은 대책이 없습니다. 하오니 이제부터, 사면 전후의 범행을 합하여 절도 3범이면 법에 정한대로 장을 때린 뒤에 ‘竊盜(절도)’ 두 글자를 양쪽 볼에 나누어 새겨서 관청의 노비로 배속시키고, 수령으로 하여금 그들이 생업에 안착할 때까지 부역을 시키지 말고 극진히 돌보게 하시고, 각 도의 감사로 하여금 수시로 상황을 점검하게 하시옵소서(세종 25년 2월 5일).
2. 경면법(黥面法) 시행
임금의 승낙이 떨어지니, 사면을 전후해 절도를 세 번 저지른 자들에 대한 형벌이 단근에서 경면으로 바뀌었다. 4개월쯤 지나서 절도 전과의 누적에 따라 죄명을 새길 위치가 촘촘하게 정해졌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면 전후의 범행을 합하여 절도 3범이면 얼굴 양쪽에 ‘竊盜(절도)’ 두 글자를 나누어 새기게 하였다.
전과가 8범 이상이면 죄명을 새길 곳이 없으니 장만 때리고 배속지로 돌려보내되, 그 사유와 범행 일자를 적어서 형조를 비롯한 전국의 관청에 보내게 하였다(세종 25년 6월 8일). 절도전과자들이 도성과 지방을 지나면서 도둑질을 저질렀을 때, 아무 기록도 없으면 전과를 확인하기가 곤란할 것을 예상하여, 중앙의 형조와 전국의 관청이 상습절도범들의 범죄경력정보를 공유하게 한 것이다.
아울러서, 사면을 전후해 4번 이상 절도를 저질렀으나 모두 경면이 시행되기 전의 범행이어서 얼굴에 자자를 하지 않은 자들도 모두 붙잡아서 ‘竊盜(절도)’ 두 글자를 양쪽 볼에 한 글자씩 나눠서 새기게 하였다. 그리고 나서도 다시 또 절도를 저지르면, 《속형전》의 규정에 따라 위에 정한 순서에 따라 지정된 곳에 먹물로 죄명을 새기게 하였다.
3. 극약처방과 피바람
그런데 경면을 채택하고 1년이 더 지나도록 안숭선이 말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도둑이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빠른 속도로 가파르게 늘어나 대신들이 사후위좌를 포기하고 물론사전으로 돌아가기를 다시 또 건의하였다.하지만 임금은 이전에 내세웠던 이유들과 다른 네 가지 이유를 네세워 따르지 않았다(세 종 26년 10월 9일).
첫째로, 옛날 중국의 수(隨)나라 때에 참외를 훔친 두 명을 사형에 처한 기록이 있으니 도적은 엄히 다스려야 옳을 것이다. 하지만 도둑이 늘어난 것은 임금인 내가 백성의 살림살이를 제대로 마련해 주지 못해서 생긴 결과라서 매우 부끄럽다.
둘째로, 《대명률》과 《당률소의》에 ‘범행이 사면보다 먼저이거나 나중이거나 상관하지 말라.’는 문구가 없다.
셋째로, 그동안 많은 죄수들을 사형에 처해서 단 한 사람도 더 죽이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하물며 법을 고쳐서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만드는 일에 동조할 수 없다.
넷째로, 정연이 형조판서였을 적에, 사면과 상관없이 처형한다면 많은 죄수를 죽여야 할 것이라고 하여서, 내가 깊이 공감을 느끼고, 당시 동부승지(형조 담당)였던 허후와 더불어서 많은 죄수를 살려주었다
임금은 사후위좌 정책을 포기하고 물론사전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밝히는데 그치지 않고 경면을 정지할 의향을 에둘러서 내비쳤다.
도둑의 얼굴에 먹물로 죄명을 새기게 한 법을 폐지할까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내가 다시 생각해보니까, 가난한 백성이 어쩌다 한 번 절도를 하였다가 얼굴에 자자를 당하면,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어려워져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가난하고 궁핍하게 될 것 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가 없다(세종 26년 10월 9일).
우참찬 권제가 나서서, 도둑들은 가난뱅이가 아니라 모두 호화롭고 부유하고 억세고 용맹한 자들이니 조금도 안타까울 것이 없다는 말로 임금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경면을 멈추지 않아도 날이 갈수록 도둑들의 준동이 심해지자 결국은 23년 만에 임금이 마음을 바꿔서 사후위좌 원칙을 포기하였다(세종 27년 7월 5일).
하지만 사전물론 원칙을 복원한 뒤로도 도둑들의 준동이 수그러들지 않았다. 수그러들기는커녕, 지독한 가뭄에 따른 연속적 사면과 왕비의 죽음에 따른 사형집행 정지 등에 편승해 소나 말을 훔치는 도둑질이 기승을 부리자, 극약처방으로 「우마절도범처벌특례」를 제정하여 시행하였다(세종 29년 5월 26일.
두 차례 이상 소나 말을 훔쳐서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소나 말을 훔치기만 하고 죽이지는 않은 도둑들은 예전처럼 외딴섬 세 곳으로 보냈다. 소나 말을 두 번 훔치기만 하고 죽인 적은 없으면 장 1백대를 때리고 왼팔 아래쪽에 ‘도마(盜馬)’ 혹은 ‘도우(盜牛)’라고 새긴 뒤에 가족과 함께 거제, 남해, 진도 등지로 보냈다.
소나 말을 훔쳐서 죽인 자는 장 1백대를 때리고 오른팔 아랫마디에 ‘도살우(盜殺牛)’ 혹은 ‘도살마(盜殺馬)’라고 문신을 새겨서 가족과 함께 거제·남해·진도 등지로 보냈다.
두 달쯤 뒤부터 살벌하고 무자비한 도둑사냥이 전국에서 전개되니, 불과 28개월 동안에 524명의 도적이 강도죄(448명)로 목이 베이거나 절도죄(76명)로 교수대에 올려져 올가미에 목이 졸려서 죽었다. 오랫동안 도적질을 반복하고서도 연이은 사면 덕분에 전과 표시만 남기고 사형을 면했던 자들이 짧은 기간에 무더기로 붙잡혀 저승으로 직행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