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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여자 Nov 11. 2017

패키지 여행을 변명한다

사실은 맹세한 적이 있다. 다신 안 가겠다고....

내 인생 최초의 패키지 여행은 5년 전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언니와 아이들과 함께 5명이 베이징에 갈 계획을 세웠는데, 그때 여행/유학 사무실을 운영하는 친구가 개인적으로 가면 다른 건 다 괜찮아도 장성에 가는 것이 꽤 골치 아프지 않겠느냐고 하길래 그 말에 설득되어 하나투어로 예약을 했다. 가격은 50만원대였던가. 3박 4일이었고 의무에 가까운 옵션 비용을 포함해서 내고 예약을 마쳤다. 가을날에 처음으로 외국에 나가는 어린이들을 이끌고 공항에서 담당자를 만나서 여행을 시작했는데 여행에서 돌아온 당일 나는 하나투어 홈페이지에 찾아가 중국 현지 담당 가이드였던 조선족 중국인을 고발하는 장문의 항의글을 작성했다. 그는 현지에서 전혀 몰랐던 옵션 투어를 제안했는데, 그 옵션이 '만장일치'가 되어야 진행 가능하다고 강조하면서 강요하고 나중엔 객실에서 협박에 가까운 언동까지 했다. 나는 그 옵션 투어에 관심도 없었을뿐더러 패키지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기념품 소량을 사 갈 돈밖에는 가져오지도 않았기 때문에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내가 다시 패키지 여행을 가면 사람이 아니다, 생각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언어도 가능하고 경험치도 있어서 패키지 안 가도 되는 거였는데에에엑!!! 정말이지 이를 벅벅 갈며 후회했다. "패키지, 함께해서 드러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


하지만 맹세는 섣불리 하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올해 초 유럽에 가기로 결심하면서 두 가지 이유로 패키지 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첫째 비용이고, 둘째 시간이었다. 자유여행으로 가서 관광지를 덜 보게 되는 것은 아무 상관없으나 '계획'을 짤 시간이 도저히 나지 않았다. 이번 여행은 애들을 싹 떼버리고(그 사이 아이들은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로 변신했다) 여자친구끼리 지난 5년 가까이 따로 만들어서 저금했던 통장을 털어서 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웬만큼 패키지의 진상을 겪게 되더라도 우린 극복할 자신이 있었다. 패키지의 진상이 중학생 아들들의 진상을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잖소.


결정은 연초에 했지만 실제 투어 상품이 나온 다음에야 예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기다렸다. 8월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는 11월에 계획했던 날짜와 맞추어 적당한 상품을 물색했다. 솔직히 회사에서 후다닥 살펴보느라 많이 보지도 못했음을 고백한다. 조건은 '스페인'에 초점을 맞추고 과욕을 부리지 않는 것이었고, 그러다 보니 의외로 상품 범위가 크지 않았다. 사람들은 유럽을 전체적으로 도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7일(실제 호텔 숙박은 5박이다) 149만원짜리 상품을 발견했는데, 항공기가 직항이 아니어서 그런지 가격도 착하고 나름 스페인은 알차게 보고 다닐 것 같아서 깊게 고민하지 않았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지난번에 하나투어에서 당했던 기억이 너무 더러웠기 때문에 아예 여행계에서 잘 알려진 회사들의 상품은 보지 않았다. 그래서 발견한 회사가 '유럽 투어로'였는데 이름을 보니까 유럽 전문인 것 같고 괜춘하잖아? 함께 갈 언니와 상품 점검을 한 후에 바로 계약을 진행했다. 계약 담당자는 딱 보니 사회초년생인 여성이었고 어쩐지 딸 같은 마음에 그래, 열심히 계약해서 용이 되렴! 이런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계약금으로 20%를 지불하면서 반전이 있었는데 이 상품ㅋㅋㅋ 모두투어 거였당? 꺄할할... 모두투어가 군소여행사에게 모객을 하청으로 뿌린 듯. 아놔.... 얼마나 허무했는지 모름ㅋㅋ 불행 중 다행이라면 하나투어는 아니잖아? 나 자신을 위로하며 계약금을 입금하고 기한이 부족한 여권도 새로 만들고 정신없이 또 일상을 살았다. 가끔씩 내가 우는 소리를 할 때마다 친구들은 '너에겐 스페인이 있잖아'라고 위로해주었고, 그 마법의 주문이 이 끔찍한 가을을 어떻게든 살아내게 해주었다. 남편과 아이가 없는 '나'만을 위한 여행이라니! 그것도 나의 절친인 우리 올케 언니와 함께!! 집에 있는 중이 소년과 헤어질 수만 있다면 내가 뭐 더 바랄 게 있겠습니까.


여행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오면서는 정말 욕 나오게 회사가 바빴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일주일이나 자리를 비우게 되니 당최 방법이 나오지 않아서 3주 정도는 거의 매일 야근을 하고 주말에도 출근했다. 여행을 앞두고 뭘 준비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었다. 마음은 불안한데 여행사 쪽에서는 안내도 빨리 오지 않고... 떠나기 전전날이 다행히 휴일이어서 그날 그나마 짐을 좀 챙겨 두었지만 막막한 심정은 그대로였다. 금요일 근무를 마치고 나서 집에서 트렁크를 들고 바로 공항으로 가는 스케줄이다 보니 황당할 정도였다. 아들놈은 밥을 차려줘도 고마워할 줄 모르는 놈이니 사실 밥 때문에 어른과 있을 필요는 없지만 감시자가 필요한 상황이어서 친정엄마에게 부탁드렸고, 집에 두고 가면서 눈에 아른거리는 건 오직 우리 개뿐....


금요일 저녁이라 리무진이 늦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막히지 않고 정시에 공항에 도착했다. 아직 인솔자가 나오실 시간보다도 일찍. 집합 장소를 파악하고 1GB 로밍을 신청하고 언니가 공항에 도착하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장소를 미리 살펴보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떠나는 일은 꽤나 설레는 일이라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게다가 내겐 이 여행을 위해 새로 지른 24인치짜리 라이언 샘소나이트 콜라보 트렁크가 있었거든! 이 귀여운 걸 끌고 매끄러운 공항 바닥 위에서 걷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언니가 도착하고 인솔자에게서 여행 계약서 및 일정표를 받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정말 엄청난 일정 덕분에 내가 어느 도시에 가서 뭘 보는지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였다. 이쯤 되면 '어디 날 놀래켜보시지?' 심정으로 들여다볼 생각도 이미 사라졌고. 온라인 체크인(개인이 직접 하라 했는데 자꾸 전산오류가 나서 인솔자님이 해주심)이 끝난 상태이긴 해도 짐을 부쳐야 해서 체크인 줄에 섰는데 이 줄이 엄청났다. 줄만 한 시간 넘게 서서 겨우 트렁크 보내기에 성공. 짐칸에 갈 때 얼마나 애가 더러워지는지 익히 경험한 바가 있어 야무지게 커버를 싸서 보냈다. 배가 고파서 기절하려는 언니를 데리고 아까 봐뒀던 식당가로 갔지만 되게 슬프네요.... 식당 10시에 닫네요.


결국 이제 공항 버거킹은 지겹다고 했건만 결국 버거킹을 먹었고, 햄버거를 반씩 나눠먹고 나서 출국장으로 들어갔다. 전체적으로 공항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새벽 비행기를 탄단 말인가 아연해졌다. 보안검색도 한참 걸렸고 문 닫아버린 면세점 중 아직 열고 있는 곳에서 담배 한 보루를 사서 게이트로 이동했다. 아직 누가 우리 일행인지도 알 수 없고, 터키항공도 생전 처음 타보는 판이고. 하도 체크인에 허비한 시간이 길어서 원래 예상과는 달리 대기하는 시간도 짧았다. 공기 주입식 목베개에 숨을 불어넣고 나니 정말 이제 떠나는 건가 싶었다.


11시간 비행의 공포에 쫀 나를 싣고 비행기가 떴다. 자정을 30분쯤 넘긴 시각이었고 나는 누구한테 머리라도 맞고 기절했다가 일어나면 비행이 끝났기를 기도했다. 장시간 비행은 언제나 그렇듯이 사람을 거의 잡아버리지만 터키항공의 반전은 '맛있는 기내식'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내식에 꽤 자부심이 돋아서 쉐프 복장을 한 승무원도 탑승시킨다고.

이스탄불에서 처음으로 우리 28명의 패키지 팀을 만났다. 가족 단위, 부부 단위, 모녀, 자매, 꽤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있었고 예상을 깨고 일행 중에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있었다. 중학생이 2명에 초등학생이 2명이었던가. 패키지 하면 모두 어르신이고 나보다 늙은 사람뿐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고정관념이었나 봐.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터키 검색대를 다시 통과했다. 그 줄이 또 엄청났다. 레이오버가 짧은 편이어서 줄 서 있을 때 은근히 '비행기 무사히 탈 수 있을까' 걱정까지 들더라고.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며 이젠 정말 마지막 비행기구나! 울었다. 다행히 이 짧은 여정의 기내식도 맛있었고.


마드리드에 내렸을 때에는 해가 쨍쨍했다. 지구를 반 바퀴 도는 동안 6시간을 벌었던 덕분이다. 입국 심사를 하는 아저씨에게 올라! 라고 인사를 하며 스페인으로 입장했다. 주차장에서 고급 버스를 보고 깜놀! 완전 신형인데 우리 돈으로 거의 5억짜리라고 했다. (차내에 화장실까지 있음) 인솔자는 내내 '이 버스가 여행 내내 탈 버스는 아닙니다. 너무 기대를 높여놓지 마세요'라고 설명했다. 버스는 그날그날 주는 대로 타는 거라고. 일정 전체를 통틀어 그는 '컴플레인'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항상 기대치를 낮추는 데에 집중했다. 어쨌든 '항상 같은 자리에 타지 마라. 그것도 패키지에서는 불만이 나오는 요소다'라는 잔소리를 들으며 높은 버스에 올랐다. '버스 투어' 시작.


지금 파는 스페인 상품 중 가장 유사한 일정표를 찾아서 첨부함.

http://www.modetour.com/Package/Itinerary.aspx?startLocation=&MLoc=&Pnum=38876023&Idx=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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