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사막을 건너
아침을 먹고 길을 나섰다. 렌트한 RAV4의 두 번째 장거리였다. 그랜드캐년은 내가 중학생 때던가, 63빌딩에 있던 아이맥스 영화관에서 본 첫 아이맥스 영화의 제목이었다. 웅장하고 듣도 보도 못한 풍광, 짧은 영화를 보면서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미국에 오면서 실제 내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은 거의 없었는데, 그래도 그랜드캐년은 한번 맨눈으로 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제 그랜드캐년으로 향하는 이 시점은 너무나 지쳐서.... 그랜드고 뭐고 집에 가서 쉬고 싶기만 했다는 점이 함정.
국립공원의 southrim을 목표로 해서 달리는데, 목적지 한 시간 전에 왠지 낯익은 지명이 있었다. williams라고... 응? 내가 숙소 예약한 동네 같은데 설마 이렇게 한 시간이나 떨어져 있으려고?? 나는 끝까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싶어서 가만히 있었다. 오후 4시쯤 비지터센터에 도착해서 캐년을 돌아다니는 버스에 올라탔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려준 사항이겠지만 그랜드캐년은 환경 보호의 일환으로 아예 버스만 돌아다닐 수 있는 구간이 있다. 그리고 이 버스는 완전 무료에 상당히 자주 오고, 중요한 포인트는 다 가기 때문에 꽤 편리하다. 요세미티에도 셔틀은 있었지만 이렇게 자주 관광객들을 제대로 케어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별로 못 봤거든)
셔틀은 네 가지 라인이 있는데, 보라색은 공원 바깥에 있는 숙박과 상가 구역까지 다니고 파란색은 공원 안에 있는 숙박시설을 순회한다. 오렌지와 레드는 각각 동쪽과 서쪽의 뷰 포인트를 운행하는데, 우리는 일단 블루를 타고 레드로 갈아탄 다음 일몰 때까지 뷰 포인트를 구경하기로 했다. 버스의 첫 정류장에 내려서 맨눈으로 만난 그랜드캐년은 이상할 정도로 그림엽서 같았다. 햇빛은 뜨거웠고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뷰 포인트마다 버스가 서고 그때마다 내렸는데, 각각의 포인트가 조금씩 다르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나중에는 구분하기가 힘들더라. 그 협곡 안으로 실제 자전거나 도보로 돌아다니는 사람도 있다는데 왜들 그러세요;; 보기만 해도 고되더만. 고도가 높아서인지 아주 조금만 오르막길을 올라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머리가 아팠다.
레드 라인의 꼭대기까지 갔다가, 일몰을 보기 위해서 모해브포인트에 내렸다. 사실 가장 좋은 곳이 여기다 저기다 말이 많지만 워낙 어디서 봐도 절경이다. 이미 바글바글하게 사람들이 일몰을 기다리고 있었다. 장엄한 대자연 안으로 가라앉는 붉은 해는 또 역시 그림 같아서 어쩐지 실감이 나지 않고 또 그림인가 보다... 싶기만 했다. 해가 지고 나자 거짓말처럼 깜깜해졌다. 버스에는 사람들이 터질 듯이 몰려서 탔고, (셔틀 운행은 일몰 후 1시간이면 모두 종료됨) 우리는 공원 안에서 저녁을 먹으려던 계획이 버스 운행 시간을 생각하면 좀 무모하다는 생각에 나가서 먹기로 결정했다.
차를 주차한 비지터 센터까지 힘들게 돌아온 후에 또 20마일 정도를 달려가서야 식당을 찾았다. 셀프 서비스인데도 산속 가게답게 비싼 피자, 파스타 집이었다. 너무 지치고 정신이 없어서 식욕이 떨어져 2인분만 시켰는데 양은 충분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정말로 우리 숙소는 공원에서 60마일 떨어진 곳이었다. 너무 미안하고 어이없어서 기분이 완전히 다운됐다. 미리 예약하면서 봤을 때엔 이렇게까지 멀지 않았던 것 같은데, 예약을 2월에 한 터라 전혀 정확한 기억이 없다. 게다가 다음 날 숙박한 후에는 라스베가스에서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새벽 2시에 일어나서 여관을 나와야 하게 생겼다.
한 시간 걸려서 도착한 숙소는 꽤 허름해 보여서 또 우울했고 엘리베이터가 없는 2층 건물의 2층 방이어서 화까지 났지만, 겉모습과는 달리 안쪽은 리뉴얼을 해서 꽤 깨끗하고 현대적이었다. 방에 도착하고 나서 남편과 나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2박을 예약한 곳이지만(1박에 150불씩이나 하지만 ㅠ_ㅠ) 이곳을 포기하고 라스베가스로 이동해서 자자고. 라스베가스는 도박 손님 모객 때문에 숙소가 싸기로 유명한데, 막상 검색해보니 소문처럼 3, 40불로 4성 호텔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만만하고 저렴한 스테이인아메리카(벌써 세 번째다)에서 세금 포함 45불짜리 방을 잡았다.
어렸을 때부터 동경했다고 할 수 있는 풍광 앞에서도 나의 마음과 몸이 여유롭지 않을 때엔 아무 감동도 없다는 것이 좀 무섭게까지 여겨졌다. 내가 무슨 무감각한 그랜드캐년의 돌덩이라도 된 듯. 정말 이상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이번 여행은 내가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을 자꾸 나 자신에게 던지게 만들었다. 나는 낯선 곳에서 자는 것도 좋아하고 낯선 음식을 먹는 것도 좋아하고 외국어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지금까지 가본 나라들 그 어디에서도 이렇게 지루하고 고통만 느낀 적이 없었다. 진짜 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내일 걱정은 다 내려놓은 다른 가족들에 대한 원망과 피곤 때문인가? 소외감 때문인가? 어쨌든 그야말로 현재 상황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었다.
이 글을 읽는 우연한 독자나 구독자들도 이런 우울함이 넘치는 여행 기록은 본 적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행을 다 마치고 난 다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 역시도 이렇게 우울한 여행은 다시 할 일이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다. 어떤 여행을 해도 이것보다는 나을 거야! 바닥을 친다는 것은 이런 장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