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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량진법잘알 Jun 16. 2022

오래된 오류투성이 계약서를 전부 개정해버려도 좋을까?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만약 오류투성이로 보이는 오래된 계약서를 다루고 있다면, 그 계약서 전부 개정을 제안하는 것은 바람직한 것일까? 현실적인 예로는, 과거에 체결된 계약서에 대하여 부분적인 일부 개정이 오랜 세월에 걸쳐 이루어짐으로써, 계약서의 전체적인 구조를 한 눈에 알아보기 힘들 뿐만 아니라 계약의 내용까지도 누더기가 되어버린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는 계약서를 전부 개정하여 처음부터 새로 만드는 것이 깔끔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아래와 같은 점을 고려하여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첫째, 계약에 법적인 오류가 존재하는 부분 외의 나머지 부분에 관하여 계약서를 개정하여야 할 특별한 명분이 없다면, 계약서의 개정을 위한 필요조건인 상대방 당사자의 동의를 얻어내기 쉽지 않다. 현실적으로 법적인 문제점이 내재되어 있는 계약서는 도처에 널려있다. 많은 계약서의 문언이 오랜 기간 동안 법적 위험성에 노출된 상태로 놓여있었던 것은, 분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낮아 지금까지 분쟁이 현실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약서전부 개정을 위하여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여야 하는데, 아직까지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은 계약서의 나머지 부분까지 정비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효용을 명확하게 제시하기 어렵다면, 상대방을 설득하여 계약서의 개정으로 나아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둘째, 개정하고자 하는 해당 계약서만으로는 전체 계약관계에서의 의존성(dependency)을 확인하기 어려워 개정 후 미처 인지하지 못한 다른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오래된 계약서라면 해당 계약서를 인용하고 있는 다양한 자료가 있을 수 있다. 한 계약이 다른 계약을 구체화 하는 기능을 하는 등 여러 계약이 수직적으로 쌓여 있을 수도 있고, 한 계약의 이행 여부가 다른 계약의 조건으로 인용되는 등 계약 간 수평적인 참조관계가 형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 모든 의존성을 정확하게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계약서를 수정하는 것은 계약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


셋째, 계약서 작성 시의 계약서 작성자의 의도를 완벽하게 파악하는 것은 어렵기에 개정 범위를 정하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계약서에는 주석이 달려있지도 않고, 개별 조항의 작성 경위와 배경을 쉽게 알기도 어렵다. 계약서의 어떤 부분은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작성되었을 수도 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해당 계약서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표현된 개념이나 문언에 각 당사자들이 주관적인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하면, 오류로 보이는 부분을 발견하더라도 그것이 전략적으로 의도된 오류인지 단순한 과실로 인한 오류인지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고, 명백한 오류 밝혀지더라도 수정하여야 할 필요성이 있을지 평가하는 것은 관련된 법률관계를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 한 쉽게 결론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오래된 계약서는 허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 당시에 아무리 최선을 다하여 작성하였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의 계약이 기반하고 있던 법령이 개정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법령이 직접 개정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규제법규가 도입됨에 따라 권리와 의무에 대한 새로운 합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 계약서를 작성할 당시에는 충분히 견고한 것처럼 보이던 판례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변해간다. 계약의 수범자들은 계약서 작성자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계약서를 나름대로 해석해가며 독자적인 관행을 형성하기도 한다. 현재의 당사자들이 미래의 사정을 협의하게 되는 계약서의 본질적인 속성상, 계약서를 완벽하게 작성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점을 감안한다면, 스파게티 코드가 되어 손 대기 두려운 소스코드만큼이나 뒤죽박죽이자 엉망인 계약서를 다루어야 할 상황이 닥치더라도,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계약서를 평가하는 것이 좋다. 우선 해당 계약서가 거래관계에서 담당하고 있는 실질적인 역할과 기능을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아야 다. 계약서가 본질적인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운 정도가 아니라면, 최대한 점진적으로 수정해가며 쓸만한 계약서가 될 수 있도록 보완해보는 것이 좋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해당 계약서와 그 법률관계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갖게 되었다면, 그때서야 조심스럽게 전부 개정을 시도해볼 수 있을 것이다.






GE Aviation의 Business & General Aviation and Integrated Systems 사업부의 General Counsel인  버턴(Shawn Barton)이 Harvard Business Review(2018년 1-2월(합본호))에 기고한  "The Case for Plain-Language Contracts"( "계약서, 쉬운 말로 써야 하는 이유")라는 글에서, 계약서를 전부 개정하기 위하여 거쳐야 했던 검토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우선 법무팀은 영업, 엔지니어링, 제품지원, 법무 등 여러 부서 인력으로 쉬운 언어팀을 새로 구성하고 수일 동안 사외 워크숍을 열었다. 쉬운 언어팀은 회사의 서비스와 관련 운영 리스크를 깊이 있게 파악했다.

법무팀에서 계약서를 완전히 처음부터 작성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초안을 만들기까지 한 달 이상이 소요됐다.

이후 법무팀은 이 초안을 외부 로펌 웨일, 고트셜 앤드 맹기스Weil, Gotshal & Manges에 감수 의뢰했다. 로펌은 초안 감수를 위해 상업적 계약 작성, 지식재산권, 소송, 분쟁해결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지닌 변호사들로 팀을 구성했다. 감수작업은 약 3주가 걸렸으며 매우 만족스러웠다.

로펌은 최종 계약서가 GE의 이해관계를 적절히 보호하는지의 관점에서 내부 법무팀에 여러 질문과 의견을 보냈다.

디지털 서비스 사업부의 법무팀은 이 버전을 계약서 작성 경험이 풍부한 GE 내부의 다른 여러 변호사들과 함께 검토했다.



 글은 난해한 법률용어(legalese)를 제거하는 것의 이점을 설명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하나의 계약을 제대로 개정하기 위하여는 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또한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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