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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쑤니 Apr 07. 2024

돌아가고 싶은, 아니 가고 싶지 않은…

열흘간의 동침



 사람들은 다른 이와 관계하는 삶 속에서 성장하며 살아간다. 나 역시도 그렇게 살아왔다.

2녀 1남의 장녀로 태어나 할머니에겐 첫 손주로 한자리 차지하며 살았던 지라 할머니와 떼려야 뗄수없이 많은 날을 함께 했었다. 어릴 적부터 한 방을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할머니의 여정에도 언제나 함께였다. 중학교에 다니던 2년 동안은 엄마가 아닌 할머니와 자취생활을 시작했다. 보호자였던 할머니가 엄마보다 가깝게 여겨졌던 시절이었다. 결혼 직전까지도 할머니랑 같은 방을 쓰며 집안일에 동생들, 시집살이까지 하는 엄마에게 칭얼거리는 큰딸일 수 없었다.(그런 상황에서 엄마를 차지할 용기 있는 아이는 아니었다.)


 엄마는 내가 결혼하던 해에 대장암 수술을 했고, 큰아이가 5살이던 해에 간암판정을 받으셨다. 지방병원에서 ‘6개월’이란 하늘이 무너지는 말을 듣고 서울병원행을 결심한 후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둘째 아이를 막 출산했던 여동생은 몸조리 때문에, 직장을 막 옮긴 남동생도 여건이 되지 않아 3살 5살 어린이집에 다니던 아이들과 남편은 시댁생활을, 난 엄마 보호자로 병원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미 암이 진행이 많이 된 상태라 수술도 안된달까 노심초사했던 건 온데간데없이 막상 수술이 내일로 다가오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수술하다가 엄마가 깨어나지 못하면 어쩌지?’ 지방병원 말대로라면 6개월은 살 수도 있는 엄마를 한 달도 못살게 하는 일이 되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서울 병원이란 곳은 환자가 수술을 하러 들어가면 지내던 병실이 없어져 버리는 시스템이었다. 수술 직후엔 중환자실로 이동하니 이 또한 보호자가 지낼 병실은 없었다. 사용하던 이불과 짐들은 유료 보관함에 넣어놓는다. 최소한의 짐만 챙겨 중환자 보호실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내 자리라고 못 박을수 없는 소파 몇 개가 다인 곳에서 밤을 새울 한 자리를 사수하기 위해 이 자리는 무조건 내 자리라는 영역표시를 낮부터 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수술대에 올랐던 오전부터 중환자실로 들어가던 오후 늦게, 그리고 그날 밤이 병원생활에서 몸과 마음이 가장 힘들었던 날이었다.

중환자실에서 2인실, 다인실로 이동하며 엄마와의 10일간의 합숙이 시작되었다. 오롯이 엄마의 보호자인 딸로만 살았던 시간이었다. 수술 후 둘째 날까지는 진통제에 의존하며 엄마의 고통스러운 순간들도 함께 직면했다.

수술하던 중간에 방송으로 보호자인 나를 찾았다.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나감을 알리며 집도했던 의사가 나에게 보여준 75%를 절제한 엄마의 간,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그것이 무섭거나 징그럽게 느낄 새도 없었다. 수술이 잘 끝나간다는 고마움에 엄마 몸속에서 떼어져 나온 암덩어리가 고맙기까지 했었다. 말도 안 된다 고맙다고 할 데가 없어서…푸하하


여섯 명이 쓰는 병실에는 아주 다양한 환자들이 있었다. 우리 엄마처럼 수술 후 경과를 지켜보는 환자가 셋, 오늘 퇴원하는 한 명, 식물인간에 가까운 어르신, 응급환자가 잠시 잠시 들르는 침상하나였다. 엄마와 같은 수술을 한 할머니는 군산에서 오셨는데 할아버지가 간호를 하고 있었다. 같은 수술이라 다른 환자보다 특히 신경이 많이 쓰였다. 얼른 좋아지시길 기도했다. 할아버지도 나를 자주 불러내어 엄마의 상태를 체크하기도 하였다.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던 병실 룸메이트였다. 하지만 평소에 고혈압, 당뇨가 없던 엄마는 하루하루 치료가 간단해지는 반면 할머니는 그렇지 못했다. 복수가 차서 새벽에 처처실에 간다거나 침대 폴대에 걸리는 약주머니가 늘어나기도 했다. 엄마는 날이 갈수록 회복되고 있었음에도 할아버지를 보면 웃을 수가 없었다. 젊은 내가 할아버지 대신 뛰어다니며 도와드린다고 할머니의 건강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함께 퇴원을 했다면 더없이 좋았겠다 싶다.

 평소에 피곤하면 코를 고는 내가 병원에서 잠을 잔다는 건 깊은 잠을 잘 수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러 명이 기거하는 병실에서 코 고는 소리로 다른 이에게 피해를 줄까 봐, 다음날 일어나면 부끄러울까 봐였기도 했지만 새벽 4시, 교대시간에 맞춰 간호사들이 걷어젓히는 커튼에 벌떡 벌떡 일어나기 위함이었다.

엄마랑 병원밥을 먹고, 병동을 돌며 운동을 하고 접견실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낮잠 자는 엄마를 말없이 지켜보기도, 밤에 못 잔탓에 꾸벅꾸벅 졸기도 하며 열흘이란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이 가는 만큼 엄마는 회복되어 갔다.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왜 그런지 병원에 엄마랑 둘만 있으니까 너무 좋아”

“엄마가 아팠던 것만 빼면”

“엄마랑 단 둘이 있었던 적이 없는 것 같아. 그래서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해”

그랬다. 내 남편, 아이들, 친정집에 아빠, 할머니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고 엄마의 건강과 나만 생각해도 되는 지금이 마치 여행을 와서 호텔에 머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으니까.

  매년 1월 20일이 되면 엄마랑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을 하곤 한다. 올해가 수술한 지 몇 년째인지를 이야기하며 그때 우리가 했던 대화와, 느꼈던 감정들을 이야기하며 지금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지방 대학병원 응급실 레지던트의 말대로 6개월이 될 수도 있었지만 우린 14년째 안녕하다.

2022년 10월 , 우리집에서  생신

2022년 10월2일/ 엄마 생신케잌/손녀가 직접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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