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입사했다. 졸업과 동시에 입사했고, 이제는 됐다는 안도감과 더불어 대기업을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그저 기쁘고 벅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커다란 것을 간과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대기업이면 만사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취업을 준비했고, 그 과정에서 적성과 흥미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대기업에 입사했으니 걱정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회사를 다니면서 늘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대기업에서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안정적인 환경이 제공되었지만, 회사에서 하는 일에 재미를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재미? 재미가 밥 먹여주냐. 월급이 밥 먹여주지. 등 따시고 배부르니 별 희한한 소리를 다 한다.'
나도 나에게 그런 말을 수도 없이 했다. 하지만 관심 없고 재미 없는 일을 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덕업일치까지는 아니어도 본인이 하는 일에 어느 정도 관심은 있어야하지 않을까. 그래야 궁금한 것도 생기고, 일도 더 열심히 하고 싶어질 텐데. 보통 그러한 과정 속에서 보람과 자부심, 뿌듯함을 느낄 텐데, 난 그러지 못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무쓸모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고, 내 마음 속에서는 나라는 사람의 존재에 대한 의문과 함께 부정적 인식이 점점 쌓여갔다. 내가 좋아하고 잘 하는 일이 어딘가에 따로 있지 않을까. 하지만 이런 고민을 입 밖으로 꺼내기란 쉽지 않았다. 결코 이해받고 공감받을 수 없는 고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조용히 찾아보기 시작했다. 회사를 다니는 동안 끊임없이 찾았다. 관심이 가는 게 있으면 뭐든지 배워보고 접해보고 찾아가봤다. 그러나 대기업을 뛰쳐나갈 만큼 잘 하고 좋아하는 걸 찾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나를 정말 모르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 뭘 잘 하고 뭘 못 하는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누구인가.
원하는 분야를 찾지 못 했고 이직 경험조차 없었던 나는 용기를 내지 못 해 회사를 다니고 또 다니다가 어느덧 10년이 넘어갔다. 한 회사를 10년 이상 다닌다는 게 대단한 거라고 주변에서 얘기해줬지만,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 않았다. 용기 없는 자의 하루하루가 쌓여 10년이 되었을 뿐이었다. 그냥 이렇게 사는 게 인생인가. 내가 잘 하고 좋아하는 걸 찾는다는 것은 사치인가. 그저 가만히 관성처럼 하루하루를 사는 게 답인가. 수많은 의문이 들었지만 답을 찾지 못 했다. 무엇보다도 대기업 타이틀을 떼어놓은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나인데, 대기업 타이틀을 내려놓으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될 것 같아 겁나고 두려웠다.
'적성과 흥미가 밥 먹여주냐. 나가라는 사람도 없는데 어렵게 들어간 대기업을 왜 나가냐. 대기업 들어가놓고 유난이다, 아주.'
이런 얘기를 들을까봐 두려워서 삼키고 또 삼켰다. 10년이 넘었으니 겉으로는 잘 적응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음 한 켠에서는 내가 좀 더 재밌게 할 수 있는 뭔가가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다 적성과 흥미가 안 맞아도 정말 너무 안 맞는 팀으로 발령이 났다. 안 그래도 마음 한 켠에 늘 '무쓸모'를 안고 살았는데, 이제는 감출 수도 없게 되었다. '무쓸모 잉여인간'이라는 단어가 전광판에 흘러가는 글자가 되어 내 마음을 괴롭혔다. 회사 안 가는 방법은 없을까. 아침마다 고민했지만 딱히 방법이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팀에서의 2년 동안 나는 안 먹던 술을 마시며 괴로움을 잊어보려했지만 현실은 바뀌지 않았다.
2년 동안 퇴사냐, 아니냐를 고민하다가 수면장애가 생겨버렸다. 가위눌림이 이틀에 한번꼴로 나타났다. 연속 3,4번 이어지는 가위눌림을 반복적으로 겪다보니 잠들기가 무서울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퇴근길에 지하철을 탔다가 아주머니와 시비가 붙었다. 마음 안에 화가 꽉 들어찼다. 누구를 향한 화였을까. 누구도 나에게 대기업에 들어가라고, 그리고 들어갔으면 버텨야한다고 강요한 적은 없었다. 화는 원인을 찾지 못 하고 방황하다, 나에게로 돌진했다. 나를 향한 화. 그것이 우울이었다. 뭘 해도 되지 않고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태.
아주머니와 지하철에서 말다툼 후 생전 내려보지도 않은 역에 내려 의자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 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감정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나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며칠 휴가를 내고 기분 전환을 위해 여행도 떠나봤지만 일시적일 뿐 달라지는 건 없었다. 오히려 돌아오는 기차칸에서 임재범의 비상을 들으며, 뭐가 그리도 서러웠는지 펑펑 울었다. 옆자리 사람이 없어서 망정이지, 옆자리 사람이 있었으면 그 분 많이 당황하셨으리라. 요새도 그 노래는 쉽게 들을 수가 없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며 나는 뭔가 단단히 잘못되고 있음을 느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도 적성과 흥미가 안 맞는 곳에서 오래 버틴 덕분에, 대기업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남지 않았던 것 같다. 적성과 흥미가 밥 먹여주진 않지만, 적어도 나는 나를 알아가고 싶어하고, 찾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는 건 분명히 알게 되었다. '정말 대기업을 나가서 잘 살 수 있어? 자신 없으면 버티는 게 답이야' 수없이 자문자답하다가, 결국 낭떠러지 끝 1cm 앞까지 몰렸을 때 그만둘 용기가 겨우 생겼다. 그렇게 직시하고 바로 잡자고 결심하며 2년간의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퇴사하겠습니다.
아무도 지지하지 않는 결정.
나가서 뭐 할 건데?
아직 계획이 없습니다만....
배가 불렀네. 배가 불렀어, 아주
-적성과 흥미 찾기 여정은 이후에 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