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 환영. 얼마나 환영하면 축 환영이라는 현수막이 걸릴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 현수막이 걸릴 정도로 환영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 누군가 이토록 환영하고 반가워하면, 어깨가 으쓱,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지 않을까. 올라가게 될 것 같다...현수막이 걸려본 적은 없어서...머쓱...환영받고 축하받을 만한, 이유 있는 큰 일이 생겼을 때, 현수막이 걸린다. 이유 없는 환영과 축하도 있을까? 무언가 큰 일을 해냈다는 조건이 안 붙어도 존재 자체로 환영받을 수 있을까?
표면적으로 보면 나는 환영받는 존재로 시작했지만, 가족 안에서 묘하게 이방인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엄마는 첫째 아들을 낳은 뒤 계속 되는 유산을 겪었다. 8년간 둘째가 없다가 내가 등장했으니 가족 안에서 나는 반가운 존재였을 것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딸이라는 얘기를 듣고 잠시 침묵하셨다는데, 아버지 실망하셨쎄용..아무튼 나는 세상에 나왔고,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을 지어주겠다고, 출생신고 전 한달간 국어사전을 끼고 살며 고민한 끝에 이름을 지어주신 거라 들었다. 여기까지 들으면 충분히 환영받는 존재로 보인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까지 새 학년이 되어 교과서들을 새로 받아오면, 오빠는 일일이 책꺼풀을 해줬다. 덜렁대고 빈틈 많은 나와 달리, 꼼꼼하고 손이 야무졌던 오빠는 튀어나오는 부분 하나 없이 깔끔하게 책꺼풀을 해줬다. 성적표를 받아오면 부모님에게 짧은 이야기를 듣고(잘 해도 '더 잘 해라', 못 해도 '더 잘 해라'. 잘 했을 때 칭찬 좀...), 8살 많은 오빠에게로 가면, 디테일하게 과목별로 지도편달을 받는다. 이쯤 되면 나름대로 챙김받는 존재였을 것 같지만, 나는 묘하게도 가족 안에서 이방인의 느낌을 안고 살았다.
자라는 아이들 사이에서 8살은 차이가 꽤 크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오빠는 이미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아직 초등학교 졸업 전인데, 오빠는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었다. 오빠의 눈에 비친 나는 유치한 놀이와 장난을 일삼는 꼬꼬마였을 거다. 성별이라도 같으면 할 게 더 많았을 텐데, 성별도 다른 8살 어린 여동생은 놀아주는 것이지, 함께 놀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을 거다. 오빠는 수준과 취향이 맞는 또래와 놀고 싶었을 거다.
오빠가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면서 하교 시간이 늦어졌고, 평일 저녁과 주말은 부모님과 나, 셋이 있는 장면으로 주로 기억된다. 아버지가 퇴근하시면 셋이 저녁을 먹는다. 식탁에서 아버지는 오늘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엄마와 나누신다. 나도 오늘 학교에서 이런 일, 저런 일이 있어서 얘기하고 싶은데, 내가 낄 틈이 없다.
'어른들 얘기하시니까 끼어들지마라.' 심각한 얘기들이 오가는 것 같고, 밥을 다 먹은 나는 조용히 내 방으로 간다.
아버지는 예민함이 꽤 높은 편이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다. 주말이 되면 어김없이 낚시터로 셋이 향했다. 저수지 물을 멍하니 바라보며 일주일의 근심과 걱정을 털어내셨던 모양이다. 낚시터에서는 내가 할 일이 없다. 또래 친구도 없고, 심심하기 그지 없는 곳. 언제 집에 가나.
낚시터는 재미가 없지만, 일단 부모님과 외출한다는 게 좋았다. 차 안에서 신난 나는 엉덩이가 들썩거려서 운전석과 조수석으로 몸이 바짝 붙는다. 하지만 부모님은 조용필 노래를 틀고 이 노래가 얼마나 명곡인지 열띤 대화를 나눈다. 이 노래가 왜 좋은 거야. 넌 말해줘도 몰라.
딱히 미움받지 않았다고 느껴서 오랜 기간 몰랐다. 미움도 환영도 아닌 그 어딘가. 나의 시시콜콜하고 시덥잖은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고 반응해주는 존재에 대한 갈망과 목마름은 오랜 기간 나를 이방인으로 느끼며 살게 했다.
부모님과 오빠는 나를 미워하지 않았고, 각자의 순간들에 성실히 살아왔을 거다. 누군가를 탓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삶이 어떻게 여기까지 걸어왔는지를 톺아보고 싶었다. 이유 없는 이방인은 외롭지만, 이유 있는 이방인은 적어도 자신으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 특별히 잘 한 건 없어도 여기까지 저벅저벅 열심히 걸어왔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를 위한 축환영 현수막 하나쯤, 내가 내 마음 속에 걸어줄 수 있지 않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