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이방인, 나의 정체성_03

by 낯선 도시

'나'라는 사람을 잘 나타내는 단어는 '이방인'이다.

Stranger, 낯선 사람, 소수.

다수의 눈에 나는 그리 보였을 것 같다.


03. '본인이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지역 무소속 이방인


나이와 키는 바꿀 수 없다.

한번 태어난 이상, 태어난 연도를 뒤로 또는 앞으로 돌릴 수 없다.

한번 자란 이상, 키를 줄이거나 늘릴 수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이방인임을 느낀다는 건 때로 슬프다.


고향도 바꿀 수 없다.

한번 태어난 이상, 내 고향을 다른 지역으로 바꿀 수 없다.


나는 태어난 곳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했다.

취업도 그 도시에서 하게 될 줄 알았는데, 인생은 예상치 못 하게 흘러갔다.

갑자기 서울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얼떨떨하지만 좋은 기회라 생각했다.

마음에 여유는 없었다.

그냥 눈 앞에 보이는 대로, 닥치는 대로 임했다.


사투리를 쓰니 뭔가 목소리가 자꾸 기어들어간다.

고향에서는 말투에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편하게 얘기했다.

때로는 선생님 흉내를 내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말하는 내 이야기에 친구들은 즐거워했고 웃어줬다.


그런데 서울에 오니 말투에 신경이 쓰인다.

똑같이 말해도 뭔가 어색하고, 사람들이 웃어주지 않는 느낌이었다.

호의적인 사람이 내 주변에 없다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덩그러니 서울에 불시착 한 느낌.

매 순간 긴장했고 미어캣처럼 주변을 살폈다.

사투리를 쓴다고 누가 혼내는 것도 아닌데, 타인의 시선을 많이 신경 썼던 나는 어설프게 서울말을 써보려 했다.


말투가 변한 것이지만, 내 안의 나도 변해가는 느낌이었다.

그 때는 그 느낌이 싫지 않았다.

서울에서 이방인이고 싶지 않았고, 동화되고 싶었다.

튀지 않고 싶었고, 그 안에 소속되는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말투는 조금씩 적응됐지만, 서울 사람도 아니고 내 고향 사람도 아닌, 애매한 경계에 서있는 느낌이었다.

고향을 강조하면 서울 사람들에게 동화되지 못 할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고향을 부끄러워하는 건, 나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일테니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이도저도 아닌 느낌을 늘 받았다.

서울에서 사는 동안 두 발이 늘 허공에 떠있는 느낌이었다.

말투만 그럴싸하면 뭐 하나.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인데.

소속되었다고 볼 수 없는 불안정감이 늘 기저에 있었다.

무엇이 나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던 걸까.


서울은 자극추구형 인간이 살기에 더없이 완벽한 도시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었다.

짜릿하고 설레지만 뭔가 모르게 불안정감을 주는 도시.


진로를 전환하게 되면서 15년 이상 지냈던 서울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고향은 언제든 나를 환영해주고 잘 왔다고 말해줄 줄 알았다.

서울과는 또 다른 설렘을 안고 왔지만, 그들과 나 사이에는 굵은 경계선이 그어져있었고, 나는 그 경계선을 쉽사리 넘을 수 없었다.

경계선 밖에 나는 우두커 서있었다.


일단은 나의 말투가 문제였다.

이상하게도 나의 말투는 여전히 서울말이었다.

가족과 어릴 때 친구들을 제외하고 처음 만난 낯선 사람에게 고향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가 않았다.

또다시 동화되기 위해 고향말을 써보려 했지만, 왜인지 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고향 사람들은 나를 경계하는 느낌이었다.

직장에 출근했더니 나의 배경을 아는 몇몇 사람들이 고향이 여긴데, 말투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나도 그 이유를 몰라서 답하지 못 했다.

그들에게 나는 서울 사람인 척 하는, 못마땅한, 탐탁치 않은 사람이었을까.


회식 자리에서 사람들의 질문 공세가 이어졌다.

부모님은 어느 동네에 사시는지, 지금 거주하는 곳은 몇 평인지, 월세가 얼마인지.

너무 개인적인 질문들이 쏟아지면서 불편감이 올라왔다.

'오늘은 여기까지요'라고 하면서 웃으면서 무겁지 않게 답하려 했다.


'**님은 본인이 서울 사람인 줄 알죠?'

순간 멍해져서 답을 못 했다.


멍해진 이유는 정곡을 찔렸기 때문일 거다.

말투는 그 사람의 정체성과 정신을 반영한다고 했던가.

'여기 사람이면서 고향을 부정하나? 서울 사람이라고 생각하니까 고향말을 안 쓰나보다'

그들이 보기에 나는 충분히 그랬을 거다.


나는 고향을 부정하지도 않고 고향에 와서 좋고, 여기에 소속되고 싶다고 쭈뼛거리며 소심하게 호소해보지만, 내 목소리는 다 기어들어간다.

그들에게 나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다.

서울에서도 이방인.

고향에 와서도 이방인.


고향이 나를 반겨주지 않으면, 도대체 나는 어디에 뿌리를 두지?

서울에서도, 고향에서도 내 두 발은 땅에 닿을 수 없는 것인가.

서울에서도 경계에 서있는 사람, 고향에서도 경계에 서있는 사람.


학기 중 전학 온 아이처럼, 멀뚱거리며 서있다.

무리 안에 낄 수가 없다.

그들에게 나의 말투와 느낌, 태도는 낯설게 다가가나보다.

그들은 조용히 나를 탐색한다.

아직 나는 들어갈 수 없다.


애써 나를 위로한다.

낯설지 않은 도시가 둘이나 있다는 건 행운이라고.

하지만 정작 내 마음은 두 도시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지도에서 길 찾기만큼이나 마음 속 길 찾기도 쉽다면 좋았으련만.

마음 속 뿌리는 아직 찾지 못 했다.


어디에도 완전히 닿지 못 한 나.

길을 잃고 떠도는 나.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 한 무소속 인간.


나는 이방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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