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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이지 Apr 19. 2024

사월 봄의 순간들: 서울의 거리와 6번 국도의 마을들

영혼을 위한 강원도 모터사이클 여행

봄이다.


어느 결에, 피는 줄도 모르게 벚꽃이 피었다. 지난 이틀 날이 더웠다. 정릉 언덕길 가로등 비친 벚꽃나무 거리는 환하다.


청계천 돌담에 담쟁이 잎이 돋았다. 아침 볕 아래 새잎은 말갛게, 윤이 난다. 담쟁이 잎이 돋는 아침 청계천은 아늑하다.


충정로 은행나무 가로수에 까치 두 마리가 집을 짓는다. 아침에 느티나무 가지를 물고 가더니, 점심을 먹고 왔는데도 여전히 가지를 물어 나른다. 두 까치가 왜, 어떤 집을 짓는 것인지를 상상해 보는 일은 아리다.


정동길 은행나무 가지에 쌀알 같은 잎이 맺혔다. 느티나무 가지에 난 잎들은 고물고물 하다. 키 큰 나무에 여린 잎이 달리는 저녁 정동길은 세월의 거리다.


6번 국도 덕소 고가차도에 개나리가 피었다. 길 양편으로 끝없이 피었다. 천지가 다 환하고 밝다.


양수리 끝없는 빈 공간에 빛이 내린다. 터질 듯한 무한의 한가운데 한 마리 오리가 동심원으로 떠있다. 무한 속을 일렁여 가는 바람이 봄 빛 가득한 수면을 전율시킨다.


광탄리 개울가 버드나무에서 연둣빛 가지가 쏟아져 내린다. 버드나무 아래 주홍빛 텐트에는 인기척이 없다. 연두와 주홍의 정물은 실핏줄로 저며든다.


용두리 둑방길에 미루나무가 줄지어 섰다. 한 여인과 흰 개가 미루나무 길을 걷는다. 미루나무 가로수길을 가는 여인과 개는 장욱진의 그림이다.


초원리 산비탈 바위벽에 진달래가 피었다. 산자락 비얄밭에선 산수유꽃이 바래간다. 박분홍 진달래와 연노랑 산수유는 드러내지 않지만 자연히 드러난다


442번 지방도로 추동리길을 선거유세트럭 한 대가 달려간다. 날은 이미 어두웠고, 트럭의 연단은 비었다. 낮 동안 열렬했을 유세트럭도 곧 불을 끄고 잠들 것이다.


봄 밤 캄캄한 길을 달린다. 고요. 정적. 깊은 호흡. 이윽고 다만 한 점. 순간. 영원. 모든 것.


이대로 달리고만 싶다. 자꾸만, 끝없이, 영원히 달리고 싶다. 벚꽃이 다 지도록, 계절이 다 가도록, 라일락과 아카시아가 피도록. 또 피고 지도록.


북악스카이웨이에 벚꽃 잎이 날린다. 분분한 꽃잎 가득한 길을 달린다. 벚꽃 잎이 조용히 날아들어 내 안에 쌓이면 좋겠다. 순하고 고운 것들이 넉넉하게 쌓이면 좋겠다.


봄이다.


사월에는 받침이 없다. 막힘과 맺힘과 조임이 없다. 느슨하고, 편하고, 가볍고, 열려 있다. 사월에 피는 벚꽃도 느슨하고, 편하고, 가볍고, 열려 있다. 벚꽃이 사월에 피는 건 우연이 아니다. 곧 오월이 오고, 유월이 온다. 오월은 사월보다 조금 좁고, 유월은 사월보다 조금 무겁지만, 오월과 유월에도 받침은 없다.


당분간은 느긋한 채여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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