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의 직업병
쌤은 절대 아무도 편애하지 않아, 공평 대마왕이다!
교실에 비타민 사탕을 한 통 사두었다. 아이들을 칭찬하고 싶을 때 건네주는 용이다. 손톱만 한 아주 조그마한 사탕이라 이래저래 꽤 후하게 나눠주고 있다. 수업 시간에 무언가를 잘했을 때도 비타민을 주고, 이타심과 배려심이 보이는 행동을 했을 때도 비타민을 준다. 가령 앞장서서 선생님의 심부름을 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친구에게 소중한 쉬는 시간을 내어 도와주거나, 어질러진 학급 물품을 먼저 정리한다거나, 뭐든 칭찬하고 싶은 모습을 발견하면 무조건 외친다. 오, 착한 일? 너 비타민!
그러면 이제 비타민을 위해 일부러 착한 일을 하는 친구들이 생긴다. 두어 개 떨어진 물건을 대충 줍고는, 선생님 저 정리했어요 비타민 주세요! 를 외치며 뛰어오는 아이들. 아니 얘들아, 이건 뭔가 뒤집어졌잖아. 보상을 바라지 않고 착한 일을 했을 때 비타민이 나타나는 거지, 비타민을 목적으로 착해지는 건 유치원생 수준이 아닐까? 이제부터 착한 일 '셀프 신고'는 비타민을 주지 않을 거야! 탕탕탕. 아이들도 수긍한다. 끄덕끄덕.
이런 얘기까지 하고 나면 이제 비타민의 다음 부작용이 등장한다. 이제 착한 일 해도 비타민도 못 받는데 뭐, 하고는 하려던 착한 일도 오히려 안 하게 되는 경우. 혹은 착한 일은 비타민을 받을 수 있는 선생님 앞에서만 하게 되는 경우. 그래서 사실 상점이나 상품을 주는 건 아이들 분위기를 보면서 조심히 쓰는 카드다.
그런데 올해는 걱정 하나 없이 듬뿍 나눠주는 중이다. 유난히 올해 아이들은 이타심이 많다. 우려스러운 부작용 없이 순수한 선의를 매일 왕창 보여주는 보물 같은 친구들.
오늘은 점심시간에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었다. 이번 달 분리수거 담당인 친구 두 명이 반에 쌓여있는 종이 쓰레기와 플라스틱들을 낑낑거리며 들고 내려갔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는데도 다시 돌아오지를 않는다. 예비종까지 치고 나서야 두 친구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반으로 뛰어들어온다. 요란스레 돌아온 아이들에게 오래 걸렸네, 하고 반응하니 속상한 목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온다.
"애들이 일반 쓰레기를 분리수거 통에 막 섞어서 버렸어요."
"거기 계신 선생님께 저희만 혼났어요."
"거기서 다 뒤집어놓고 하나하나 다시 분류하느라 늦은 거예요."
"5층까지 바로 뛰어 올라왔는데도 점심시간 다 끝나버렸어요."
"애들이랑 분리수거 규칙 다시 세워야 할 것 같아요. 저희 하나도 못 놀았어요."
거의 랩 하듯이 쏟아져 나온 서러움에 고마움과 기특함이 떠올라 바로 비타민 통을 꺼냈다. 다행히도 손톱만 한 비타민으로도 점심시간이 날아간 아쉬움이 달래 진다. 반 전체 아이들에게 앞으로의 분리수거에 대해 주의를 주며 오늘 고생해준 두 친구를 칭찬해주고 있는데, 지난달 분리수거 당번이었던 친구 둘이 이번에는 입이 툭 튀어나온다.
"선생님, 저희도 매주 분리수거 다 다시 했었는데요."
"맞아요 매번 뒤집어서 다시 하느라 점심시간에 하나도 못 놀았어요."
"착한 일 셀프 신고 안 하기로 해서 이야기 안 한 건데..."
아이코. 얼른 두 친구를 앞으로 불러 비타민을 쥐어준다.
"선생님이 부족해서 너희 고생하는 걸 놓쳤다. 미안해. 한 달 동안 너무 고마웠어."
비타민을 나눠주는 선생님도, 묵묵히 분리수거를 한 지난달의 두 친구도, 문제 제기를 해서 분리수거 규칙을 개선하고자 했던 이번 달의 두 친구도 다들 선의를 가지고 착하고자 했던 것뿐인데. 왜 누군가는 속상해지고야 마는지. 이런 사소한 일들도 반복되다 보면 아주 병이 생긴다. 공평하고 공정해야 하는 강박관념 같은 것.
어릴 때 친구들과 좋아하지 않는 선생님에 대한 불평을 할 때면 꼭 하던 말이 있다.
"선생님은 맨날 편애해."
저 쌤은 남자애들만 좋아해. 그 쌤은 공부 잘하는 애들은 안 혼내더라. 절대 안 빠지고 나오던 말들. 만약 우리 반 아이들이 이런 걸 느끼는 순간 내가 하는 사랑의 잔소리는 반발심에 무조건 튕겨 나오겠지. 그래서 나는 늘 눈에 불을 켜고 공평하려고 애쓴다. 30명 다 줄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아무한테도 주지 말아야 하고, 한 명이라도 주려면 30명 전부 줘야 한다. 그게 뭐든지.
심지어 교실 밖에서도 직업병이 도져 친구들한테까지 나 혼자 소심하게 공평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도 꼭 이렇게 교실에서는 억울한 친구들이 생기고 만다. 누구 하나 억울한 친구가 한 명도 없었으면 좋겠는데, 당연한 일이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어릴 때는 세상을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살면 억울하게 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 거라고 믿던 때도 있었다. 내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현명하게 해결하면 되는 거라고. 정의는 결국 승리하는 거니까! 그런데 너도 정의고 나도 정의면? 너무 어렵잖아.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걸.
살다 보면 악의가 있는 사람이 없어도 누군가 상처를 받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사실은 하나 있다. 속상하고 억울하고 미움이 차오르는 순간에도, 내가 눈치채지 못한 누군가의 선의가 어딘가에 있으리라 하는 것. 어릴 때 불평했던 선생님들께서도, 사실은 편애하려고 하신 건 아닐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