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어머니 댁에 선물로 들어온 지리멸치가 있었다. 내키지 않았지만 맛있는 멸치라며 어머니께서 내 짐가방에 찔러 넣어 주셨다. 가져온 멸치는 김치냉장고 깊숙이 처박히다시피 오랜 시간 외면당하고 있었다. 멸치에 대해 일방적 패배감 같은 것이 있는 나는 자주 눈 맞추지 않기 위해서였다. 멸치볶음은 늘 호기롭게 시작했다가 실망으로 끝을 맺기 일쑤였다. 갓 볶았을 때는 야들야들하던 멸치가 식으면서 조청 입힌 강정처럼 딱딱해져 한 덩어리로 굳어버린다. 젓가락으로 방망이질을 해대며 부셔서 먹어야 할 정도로 굳는 멸치를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께 유튜버의 도움을 받아 멸치볶음을 다시 시도했다. 때로는 휘발성 강한 기억력이 고마울 때가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출산이었고 사사로운 예로는 실패한 요리의 도전이다. 세상 수많은 고통 중 산고의 아픔만 한 게 없다고들 하지만 그 고통은 금세 잊힌다. 하물며 멸치볶음한테서 받은 패배감이야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연일 고공행진이다. 예전에 비해 시골에서 가지고 온 식재료를 귀중히 여기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없는 거 없이 다 있는 유튜버의 레시피는 신기방기 천지인 세상이다. 마요네즈 한 스푼이면 멸치가 굳어 돌덩이가 되는 현상을 막아준다는 말에 솔깃했다. 사실 예전에도 이 비법에 대해서 들어본 내용이지만 굳이 몸에 이롭지도 않은 재료를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아무리 건강식이어도 맛없어 손이 안 가는 것보다 조금 덜 건강식이어도 맛있게 먹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솜씨가 별로인 내게 남편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MSG의 유해가 입증된 것도 아니라고, 설혹 그렇다 해도 조금 넣어 맛있게 먹으면 그게 건강에 더 좋은 게 아니겠냐는 내용이었다. 내 반찬이 맛이 없다는 뜻이란걸 인정하면서도 좀처럼 맛 첨가물 사용을 수용하지는 않았었다.
팬에서 멸치를 볶아서 꺼낸 다음 마요네즈 한 스푼을 넣어 섞어 둔다. 그런 다음 만들어둔 양념장을 팬에서 살짝 볶다가 불을 끈 다음 멸치를 넣어 버무렸다. 마지막에 물엿과 참기름 깨소금으로 마무리했더니 멸치볶음은 완성. 마요네즈를 넣는 것 외에 여타공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신기하리만큼 멸치는 식어도 굳지 않았다. 밑반찬으로 먹다가 오늘은 깻잎과 함께 김밥 속 재료로 넣어 김밥을 말았다. 김밥집에 야채 김밥에 비해 멸치 김밥은 단가가 더 비싸다. 속 재료가 더 풍부해지고 깻잎의 향긋함이 멸치의 비린 맛을 감쪽같이 숨겼고 봄 내음이 들어앉았다는 착각이 들었다. 한 번의 수고로움으로 여러 때를 편하게 먹고 있으니 역시 맛있고 봐야 한다.
넣지 말아야지 했던 마요네즈 한 스푼의 허용이 이렇듯 큰 뿌듯함이 될 줄이야. 고집도 적절한 때를 알고 피워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