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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나 Nov 01. 2024

해독하고 싶어

사인앤시그널 연극 후기  

流れゆく季節




을지공간에 갔다. 티켓을 사고 그곳에 이갈리아의 딸들 책이 있어 몇 년 만에 책을 펼쳤는데 예전에 읽었던 부분이 기억이 나서 신비했고 문화공간에는 페미와 비건과 책이 없을 수 없지 않을까 웃으면서 그곳에 속해 있다는 게 좋았다. 책을 잠시 읽다가 연극하는 공간에 입장했다.


교실이 생각났다. 그 정도로 소규모라 40명도 안 되었고 나는 맨 앞자리고 배우들과 두 발자국 거리여서 숨을 죽이고 최대한 조용히 하려고 노력했다.


무대는 내 마음이 어떻든 제시간에 시작된다.


그렇게 작은 공간에서 가까이 배우들을 보면 어떤 기분이냐면 내가 잠시라도 그들 연극에게 침범될까 걱정된다. 그들 한 명이라도 나를 잠시 주시하는 게 느껴진다면 심장 소리가 커지고 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았고, 내가 움직이는 소리가 나면 너무 크게 들릴까 봐 연극에 폐를 끼칠 것 같았다.


그러나 다행히 배우들은 모두 몰입력이 무시무시하게 좋아서 두 발자국 앞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신경 쓰지 않고 서로만 있는 것처럼 집중하며 연기해서 놀라웠고, 그 연기력으로 배우에게 압도당해서 관객과 나는 현실에 대한 것들 몇 개는 고 극에 같이 빠져 버린다.


배우가 한 관객을 바라보면서 관객이 주목받는 몇 초의 시간은 내 자리가 아니었지만 나는 자꾸만 대사 하나하나에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곳의 여성들이 2차 창작에 대해 울분을 토하는데 나의 숨겨두었던 질투와 욕망, 슬픔이 하나하나 해체되고 해부되고 찢겨서 손전등으로 내 어둠이 확 반사되는 기분이다.


그들이 상자에 올라서서 꺼내는 독백은 제단의 신도와 다를 바 없이 간절해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이 되는 것만 같다.



극에서는 극 밖과 극 안이 구분되지 않는 대사가 오간다. 현실에서 고통받는 여자가 온라인에서 창작을 할 때도 버거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말하고, 배우로서 배우를 말하고, 높은 결과와 수익을 내지 못하면 잘못된 사람이라고 압박하는 사회로 인해 창작을 자유롭게 공유하는 온라인에서도 타인의 반응에 집착하기 쉽고, 나의 창작을 결과가 어떻든 내 창작과 창작을 넘어 나 자신을 좋아하지 못하는 여자의 괴리를 말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작하는 여자들의 절실한 사랑이 자신도 알 수 없을 만큼 창대해서 달리기를 왜 멈출 수 없는지에 대해 심장이 뛰게 극을 끌어당긴다.


-


사실 누군가 나를 불태워 버리도록 관심받고 싶어. 그러나 그런 내가 너무 한심해. 그러지 못했다는 걸 아니까. 그러나 관심을 받아도 관심에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게 보이고 싶어.


저 글은 나보다 더 못 쓴 것 같은데 오래 쓰고 많이 썼다고 주목받네. 그러나 오래 많은 글을 쓰는 것과 계정에서 트윗을 꾸준히 써서 트친과 친해지고 그 판에서 친목을 오래 유지하는 것도 그 사람이 잘한 것이지. 그러나 사실은 질투가 난다. 저 사람, 저 계정의 글이나 트윗을 읽는 사람들 반의 반이라도 내 글을 읽었으면 좋겠다.


아니 사실 다행이다. 이 글은 사실 표면적으로는 그들 이야기보다는 내 이야기잖아. 내가 너무 많이 들어가서 괴롭다. 누구에게 영원히 이해받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글에서도 나는 가장 취약하고 수치스러운 나를 글에 확 꽂아버린다. 내게 내 글에 진실이 없으면 곧 죽어버리는 것처럼.


다행히 나는 무명하다. 그래서 몇 명 내 글을 조회하지 않는다. 나는 겉모습을 보고 모두가 쉽게 지나칠 수밖에 없는 나의 글을 들고 멍하니 나를 지나치는 사람들을 쳐다보는 기분이다.


글에 내가 너무 많아서 글을 전부 내렸다.


새로운 글을 올릴 수도 그걸 다시 내릴 수도 있을 것이지만 결국 나는 알고 있었다. 그게 내 글의 성질이었다. 내가 너무 많은 글.


내 글을 사랑한다면 나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일률이 적용되는 세상.


내가 아니면 영원히 나오지 않는 글이 있다고 꽂혀버리는 순간이 있다.


그렇게 쓰기 시작했고 시작을 버리기 싫어서 끝을 낸다. 그리고 끝을 냈으니까 올렸다.


그러나 결국 나는 사랑받고 싶어서 글을 올렸던 것 같다.


나를 이렇게까지라도 보여줄 수 있으니 나를 사랑해 달라는 수치스러운 구애. 나라는 여자가 여기 있다는 절실한 독백.


절실함은 그 크기만큼 배신감을 안긴다. 나는 단기간에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언어를 만들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내가 가장 사랑받고 싶었던 결과로 인기를 얻지 못하는 나는 나를 버틸 수가 없어서 괴롭다.


어느 정도가 단기인지 모른다. 그 단기는 1년을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1년도 그 내부에서 못 버티는 인간, 스트레스에 연약한 인간이라 불안한데.


그러나 적게나마 내 글을 좋아해 주는 이들이 있었지만 나는 미미한 반응에 만족하지 못했고 외부와 내면의 여러 충돌을 사유로 글을 내리고 수치의 나를 모두가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과연 다행스러웠나.


다행만으로는 끝나지 않을 감정이 있다.


내가 그 커플링의 메이저성이라는 도움을 받기라도 해서 누군가에게 내 글을 읽히게 하고 싶었을 정도로 간절했을지라도 


결국 나는 온 마음을 다한 진심이 나를 이겨버리고 나서야 창작을 할 수 있었고, 진심이 나의 괴리를 넘지 못한다면 나는 더 이상 창작할 수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서. 소수자성을 숨겨야 하는 현실에 괴리를 느끼고, 늘 거짓과 진실에서 아슬아슬하게 외줄 타기를 하는 나에 대한 충돌을 여기서까지 느끼고 싶지 않아서.


나는 글을 쓸 때 내가 아니면 안 되었다.


허구를 써도 나를 써야 한다. 나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이 존재해야만 한다. 그게 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순간은 소중했다. 그렇게 제대로 된 글을 단기간에 많이 완성해 본 시기는 처음이었다. 그 이유는 내 글에 대해 길게 감상을 남겨 주었던 언니 한 명 때문이었다.


그래서 포타라고 할 수 있는 걸 처음 완성했고 계속 썼었다. 그래서 한 번 완성을 하니까 언니가 보지 않아도 계속 쓰고 완성시킬 수 있었다. 뇌리에 맞듯 내가 쓰지 않으면 나오지 않을 글들을 썼었다.


그렇게 2차 창작으로 포타를 쓰면서 흐릿했던 목적이 마음속에 새겨졌다.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라고. 내 최종은 이거라고. 이거 아니면 안 된다. 인기가 많지 않아도 내가 글이 되는 글을 평생 쓰고 싶다. 언젠가가 없어도 나는 글을 쓸 때 모든 상념을 잊을 수 있다. 오직 글과 나만 있다. 글과 글, 나와 나만 자리한다.


그곳에서 나는 나를 태운다. 바람이 불고 연기가 나도. 기어코 재가 되어도.


이상한 일이다.


그 이상한 일에 대해 여자들이 울분을 태우며 연기하고 있었다. 혼자만이 느낀 감정이 아니라니.


저 사람의 창작만으로 저 사람의 우선이 되고 싶었다.


나를 소모하는 일이라고만 정의하기에는 나는 달리기를 몰고 끝내며 너무나 해방을 느꼈다.


나는 그곳에서도 외로웠다.


나는 돌고 도는 분란이 지긋지긋해서 계속 관두었다.


그런데도 다시 설렜다. 기준이 어디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높은 나, 좋았던 감정을 잊어버린 나를 설레게 하는 여자를 목도해 버렸다.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사람에게 별것이 되지 못했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그렇게 관심 있어하지 않다는 걸 이르게 알고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을 하려고 애쓰면서 내 마음을 강압적으로 접고 구겨서 관심을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했고, 나중에는 나와 맞는 사람을 찾을 수 없어서 계정을 없앴고 그 모든 것과 이른 속도로 멀어졌다.


구긴 편지는 더 이상 그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나라는 사람도 구겨져서 그 기능을 하지 못한 사람 같다.


그러나 구겨지든 찢어지든 편지조각들은 내 안에 쌓인다.


내가 보냈던 편지도 내가 보내지 못했던 편지도 찢어지고 버려진 편지도 어느새 내게 쌓여있다.


내 안에 편지가 차 있다.


안에 편지가 넘치는 사람이라 나는 내 앞에서 편지가 찢어지는 것을 각오하고 편지를 보낸다.


화가 나고 울음이 차올라도 편지를 보낸다.


사랑을 기대만큼 수신받지 못하는 건 그 자체로 절망이라는 걸 누구보다 알면서도.


편지를 쓰지 않는 건 내가 아니니까.


상상도 못 할 파장을 불러일으키는 편지를


자꾸만 쓴다.


그게 여자들이다.


파탄과 벅참과

괴괴와 압도를

비정상의 충격을


진공과 무중력을 향해

호흡도 제대로 못하게


펼치면 기어코 돌아갈 수 없게 만든다.


비범한 여자들은 비정상일 수밖에 없다.


여자들로 인해 정상은 무너진다.


창작하는 여자들은 세계를 재건한다.


어떤 여자는 여자의 창조를 목도하고


자신은 창작을 내 안에 각인하며 창작하기 위해 태어났다고


자신을 구원한다.


자신은 신이 된다.


이건 신실성에 대한 이야기다.


죽어서야 나는 창조를 멈출 것이다.


내가 존재한다면 자신 세계 창조는 멈출 수 없다.


그게 나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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