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대감집 노비의 영수증
1. 줬다 뺏는 것보다 잔인한 것
보험사 앱 화면에 뜬 숫자는 허 과장의 시력을 의심케 했다. 10년 넘게 매달 50만 원씩, 자동이체로 꼬박꼬박 빠져나간 돈이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도 원금만 6,000만 원이 넘어야 했다. 하지만 화면에 뜬 '해약환급금'은 4,000만 원 남짓이었다.
"아니, 내 돈 2,000만 원이 어디로 갔어?"
고객센터 상담원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차분했다.
"고객님, 종신보험은 순수 저축 목적이 아닙니다. 위험 보장을 위한 사업비와 설계사 수당 등이 차감되기 때문에..."
'사업비'. 그 생경한 단어가 허 과장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엄마 지인이라며 웃으며 찾아왔던 설계사 아주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분명 "은행보다 낫다", "나중에 다 네 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10년이 지난 지금, 허 과장은 앉은 자리에서 중고차 한 대 값을 날린 셈이 됐다.
2. 리볼빙, 무이자가 아닌 고리대금
설상가상으로 리볼빙의 실체도 드러났다. 그동안 '이번 달에 다 안 갚아도 되는 혜택'이라 믿었던 서비스의 이자율은 연 18%에 육박했다.
매달 10%만 결제하고 이월시킨 잔액은 복리의 마법을 타고 눈덩이처럼 불어나 있었다. 지난달 명품 가방과 여행 경비로 긁었던 카드값은 결제 대금의 10%만 빠져나갔을 뿐, 나머지 90%에는 사채나 다름없는 이자가 붙어 다음 달로, 또 그다음 달로 미뤄지고 있었다.
허 과장은 서둘러 엑셀을 켰다. 16년 동안 성실히 일해온 결과물을 정리해 보기 위해서였다.
* 자산: 보증금 5,000만 원, 보험 환급금 4,000만 원, 중고차 한 대.
* 부채: 리볼빙 이월 잔액 2,500만 원, 마이너스 통장 3,000만 원.
손에 쥘 수 있는 순자산은 채 4,000만 원도 되지 않았다. 16년을 대기업 과장으로 살며 매년 해외여행을 가고, 수백만 원짜리 코트를 인스타그램에 자랑하던 '우월한 허 과장'의 실성적표였다.
3. 무너지는 인스타그램의 성벽
그날 밤, 허 과장은 습관적으로 인스타그램을 켰다. 새로 올린 신상 스니커즈 사진에 '좋아요'가 달리고 있었다.
[와, 과장님 역시 안목 최고세요!]
[부러워요, 저도 사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엄두가 안 나네요.]
댓글을 읽는 허 과장의 손등에 소름이 돋았다. 방금 전 확인한 18%의 이자율과 반토막 난 보험금이 떠올라 구역질이 났다. 사람들은 그의 '껍데기'를 부러워했지만, 그 껍데기를 유지하기 위해 허 과장은 자신의 미래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때, 단체 카톡방에 친구 준호의 메시지가 올라왔다.
"애들아, 나 이번에 광교에 아파트 청약 당첨됐다. 입주 때 술 한잔 살게!"
친구들이 축하 메시지를 쏟아낼 때, 허 과장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기가 밥을 사며 우월감을 느끼던 친구들은 어느새 자산을 쌓아 앞서나가고 있었다. 자신은 그저 '대감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주는 사료에 취해, 남의 눈에 멋져 보이는 노비복을 사 모으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을 뿐이었다.
허 과장은 휴대폰을 엎어 놓았다. 어두운 방 안, 충전기의 빨간 불빛이 마치 독촉장처럼 깜빡거리고 있었다. 내일은 카드사에서 전화가 올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기 싫은 그 '지방 근무지'로 출근해야만 한다. 이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그는 이제 회사가 망할까 봐 무서워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