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당근마켓에 내놓은 자존심
1. 18%의 공포, 그리고 첫 번째 거래
리볼빙 수수료 '연 18%'라는 숫자는 허 과장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이명이 되었다. 자려고 누우면 천장에 숫자들이 둥둥 떠다니며 그의 목을 죄었다. 당장 이번 달 결제일을 막지 못하면, 그토록 사수해온 '대기업 과장'의 신용등급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판이었다.
허 과장은 결국 장롱 문을 열었다. 인스타그램에서 수백 개의 '좋아요'를 받게 해 주었던, 한 달 치 월급을 고스란히 바쳐 샀던 명품 코트와 한정판 스니커즈들이 주인을 기다리듯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이게 다 얼마짜린데..."
그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들었다. '당근마켓' 앱을 설치하고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거울 앞에서 모델처럼 포즈를 취하며 찍던 OOTD(오늘의 착장) 사진과는 달랐다. 바닥에 옷을 대충 펼쳐놓고, 조금이라도 더 비싸게 팔기 위해 얼룩이 없는지 살피는 그의 모습은 흡사 전당포를 찾은 몰락한 귀족 같았다.
2. "네고 가능할까요?"
[판매글: 미시착 새상품급 코트 - 120만 원]
글을 올린 지 5분도 안 되어 채팅 알람이 울렸다. 심장이 뛰었다. 하지만 내용은 기대와 달랐다.
'구매하고 싶은데 80만 원에 안 될까요? 지금 바로 갈 수 있어요.'
'과장님, 이거 작년 모델인데 좀 비싸게 올리셨네요. 70에 주시면 제가 선심 써서 가져갈게요.'
허 과장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인터넷 속 익명의 사람들은 그가 이 옷을 사기 위해 감수했던 할부의 고통이나, 인스타그램에서 누렸던 찰나의 영광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그들에게 이 옷은 그저 싸게 후려쳐야 할 '중고 물건'일 뿐이었다.
결국 허 과장은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거래를 약속했다. 퇴근 후, 어두운 아파트 단지 뒤편에서 구매자를 만났다. 상대는 허 과장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대학생이었다.
"와, 진짜 깨끗하네요. 아저씨, 급전 필요하신가 봐요?"
'아저씨'라는 단어와 '급전'이라는 단어가 섞여 귀에 꽂혔다. 허 과장은 대답 대신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현금을 받아 쥐었다. 120만 원짜리 자존심이 60만 원짜리 지폐 뭉치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3. 사라진 팔로워, 남겨진 비루함
집으로 돌아온 허 과장은 인스타그램을 켰다. 습관적으로 사진을 올리려다 멈칫했다. 오늘 판 코트를 입고 찍었던 예전 사진 아래에 달린 댓글들이 가식적으로 보였다.
그는 결심한 듯 인스타그램 계정을 '비공개'로 돌렸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스마트폰의 조용함이 찾아왔다. 화면 속 세상은 화려했지만, 손바닥 위에 남은 것은 차갑게 식어가는 편의점 도시락과 다음 달 결제해야 할 리볼빙 고지서뿐이었다.
그때, 회사 단톡방에 공지가 올라왔다.
[공지] 다음 주 본사 인사팀 주관 '직무 역량 평가' 실시 예정. 평가 결과는 향후 부서 배치 및 연봉 협상에 반영됨.
허 과장의 손이 떨렸다. 스펙도, 경제 지식도 없이 오직 '시간'만 축내며 버텨온 16년. 대감집 노비로서 누렸던 평화로운 워라밸의 대가가 이제야 청구되고 있었다. 그는 장롱 안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깨달았다. 팔아치울 옷은 이제 몇 벌 남지 않았고, 팔아치울 미래는 이미 바닥이 났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