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메기 한 마리와 낡은 미꾸라지
1. 평화의 종말
허 과장이 16년간 지방 근무를 버틸 수 있었던 건 역설적으로 본사의 ‘무관심’ 덕분이었다. 적당히 돌아가는 공장, 적당히 수치만 맞추면 터치하지 않는 시스템. 하지만 세상은 변했고, 회사는 더 이상 허 과장의 적당함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월요일 아침, 사무실 분위기가 서늘했다. 본사에서 '경영 효율화'라는 명목으로 젊은 대리 한 명을 파견 보낸 것이다. 이름은 김승우. 서울 명문대 출신에 MBA를 막 마친, 소위 '엘리트 코스'를 밟고 있는 친구였다.
"허 과장님, 반갑습니다. 본사 전략 기획팀에서 온 김승우입니다. 당분간 이곳 프로세스 점검을 맡게 됐습니다."
반듯한 수트 차림에 아이패드를 든 김 대리는, 무릎이 튀어나온 면바지에 누렇게 변한 와이셔츠를 입은 허 과장을 묘한 눈빛으로 훑었다. 그건 동료를 보는 눈이 아니라, 유효기간이 지난 기계를 보는 눈이었다.
2. 드러난 민낯
점검은 잔인할 정도로 빨랐다. 허 과장이 16년 동안 '노하우'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온 업무 방식들이 김 대리의 엑셀 시트 위에서 '비효율'이라는 붉은 글씨로 변해갔다.
"과장님, 이 재고 관리 시스템은 10년 전 방식이네요? 요즘은 클라우드로 실시간 연동하는데, 왜 아직도 수기로 입력하고 엑셀로 따로 관리하시죠?"
"아, 그게... 현장 사람들 나이가 많아서 이게 더 편해."
"편한 게 아니라 게으른 거죠. 이 프로세스 하나만 바꿔도 연간 운영비 15%는 절감됩니다."
사무실 막내 사원들조차 김 대리 주위에 모여 최신 툴을 배우기 시작했다. 허 과장은 순식간에 자기 사무실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16년간 쌓아온 짬밥은 '경험'이 아니라 '적폐'가 되어 있었다.
3. 직무 역량 평가의 역습
오후에는 공지되었던 '역량 평가' 면담이 이어졌다. 면담실에 마주 앉은 팀장은 평소의 형님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허 과장, 솔직히 말할게. 본사에서 이번 평가 결과 토대로 인력 재배치한다는 거 알지? 자네 점수가... 최하위권이야."
"팀장님, 저 여기서 16년 보냈습니다. 이 공장 구석구석 제 손 안 닿은 곳이 없다고요."
"그러니까 문제라는 거야. 16년 동안 구석구석 알기만 했지, 바뀐 게 없잖아. 본사에서는 자네 같은 '고연봉 과장' 한 명 연봉이면 김 대리 같은 신입 두 명 뽑는 게 이득이라고 생각한다고."
'고연봉 과장'. 한때 친구들 앞에서 우월감을 느끼게 해 줬던 그 수식어가, 이제는 목을 매는 밧줄이 되어 돌아왔다.
4. 텅 빈 책상, 꽉 찬 고지서
퇴근 시간, 허 과장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화면 하단엔 여전히 카드사 앱에서 온 결제 예정 문자 알람이 떠 있었다.
> [XX카드] 허* 님, 25일 결제 예정 금액: 4,850,000원 (리볼빙 이월 포함)
당근마켓으로 명품 옷 몇 벌 팔아 손에 쥔 돈은 이미 생활비와 이자로 녹아 없어졌다. 회사를 그만두면 당장 다음 달부터 신용불량자가 될 판인데, 회사는 대놓고 그에게 '너는 쓸모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옥상으로 올라가 담배 한 대를 물었다. 멀리 서울 쪽 하늘을 바라보며 허 과장은 처음으로 절실하게 생각했다.
'차라리 그때 서울 본사 발령을 고집했더라면, 아니, 인스타그램 할 시간에 엑셀 자격증이라도 하나 더 따 두었더라면.'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가장 비싼 이자를 청구하며 찾아오는 법이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아내였다.
"여보, 오늘 우리 기념일인 거 잊었어? 아이가 아빠랑 외식한다고 아침부터 들떠있는데, 언제 와?"
허 과장은 대답 대신 마른세수를 했다. 대감집 노비의 삶이 안전할 거라 믿었던 16년의 세월이, 비릿한 담배 연기와 함께 흩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