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투잡 뛰는 대감집 노비
1. 밤의 과장, 낮의 노비
아내와의 기념일 외식은 비참했다. 아이가 좋아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면서도 허 과장은 입안의 고기 맛을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에는 18%의 리볼빙 이자와 오늘 낮 김 대리가 비웃듯 던진 "비효율적"이라는 단어만이 뱅글뱅글 맴돌았다.
결국 그는 결단을 내렸다. 자존심이 밥을 먹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운동 좀 하려고. 요즘 살이 너무 쪄서 밤에 잠깐씩 뛰고 올게."
아내에게는 건강을 핑계 댔다. 하지만 그가 들고나간 것은 운동화가 아니라, 낡은 경차 트렁크에 숨겨둔 배달용 보온 가방이었다. 대기업 과장의 정장을 벗어던지고, 목이 늘어난 티셔츠와 캡 모자를 깊게 눌러쓴 허 과장은 이제 '배달 파트너 62번'이 되었다.
2. "문 앞에 두고 벨 눌러주세요"
배달 앱의 알람 소리는 회사 단톡방 알람보다 훨씬 더 심장을 조여왔다. 첫 배달지는 그가 사는 아파트에서 불과 두 블록 떨어진 신축 단지였다.
"제발 아는 사람만 만나지 마라."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인스타그램에 필터를 입혀 올리던 화려한 '허 과장'은 간데없고, 피곤에 찌든 마흔 살 사내만 서 있었다.
배달 완료 후 수수료 3,500원이 찍혔다.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 하지만 리볼빙 수수료를 갚기 위해서는 이런 배달을 최소 700번은 더 해야 했다. 16년 차 대기업 과장의 시급이 편의점 알바보다 못하다는 현실이 가슴을 후벼 팠다.
3. 가장 완벽한 굴욕
세 번째 배달지는 평소 허 과장이 자주 가던 고급 초밥집의 포장 주문이었다. 하필이면 주문자의 닉네임이 익숙했다.
[주문자: 승우승우]
설마 했다. 하지만 배달지에 적힌 호수는 본사에서 내려온 김 대리가 임시로 머무는 오피스텔이었다. 허 과장은 헬멧 실드를 바짝 내리고 고개를 숙였다.
"배달 왔습니다."
문이 열리고, 편안한 파자마 차림의 김 대리가 나타났다. 그는 맥주 캔을 손에 들고 태블릿 PC로 무언가를 분석하고 있었다. 아마 내일 허 과장을 더 몰아붙일 기획안일 것이었다.
"아, 거기 두세요. 수고하세요."
김 대리는 허 과장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넸다. "잔돈은 됐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컸다. 허 과장은 김 대리가 준 거스름돈 2,000원을 손바닥이 하얘지도록 꽉 쥐었다. 낮에는 무능하다고 구박받는 상사로, 밤에는 팁 2,000원에 고개를 숙이는 배달원으로. 허 과장의 세계는 그렇게 철저히 분열되고 있었다.
4. 0원의 가치
새벽 1시, 겨우 2만 원 남짓한 수익을 올리고 돌아오는 길. 편의점 앞에 털썩 주저앉은 허 과장은 김 대리가 준 2,000원으로 캔커피 하나를 샀다.
인스타그램을 켜보니 팔로워 중 한 명이 유럽 여행 사진을 올렸다. 불과 몇 달 전까지 그 자리에 서서 우월감을 뽐내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텅 빈 장롱과, 내일 아침 김 대리의 눈치를 보며 출근해야 하는 비루한 일상뿐이었다.
'대감집 노비면 뭐 해. 내 집 하나 없는데.'
커피는 유독 썼다. 허 과장은 문득 궁금해졌다. 자신이 16년 동안 쌓아온 '경력'이라는 것이, 지금 손에 든 캔커피 하나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