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헬멧 속의 눈물
1. 들켜버린 비밀번호
허 과장의 밤은 점점 길어졌다. 퇴근 후 4시간, 주말 10시간. 다크서클은 턱밑까지 내려왔고, 낮 시간 사무실에서는 자꾸만 꾸벅꾸벅 조는 일이 잦아졌다.
"허 과장님, 어제 제가 드린 보고서 피드백은요?"
김 대리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허 과장이 번쩍 눈을 떴다. 모니터에는 흰 창만 띄워져 있었다. 사무실 막내들이 킥킥대며 자기들끼리 메신저를 주고받는 게 보였다. '허 과장 또 존다', '완전 좀비네' 같은 말들이 오가고 있을 게 뻔했다.
"아, 미안. 요즘 몸이 좀 안 좋아서..."
"과장님, 몸 관리도 실력입니다. 이래서야 어떻게 같이 일을 하겠습니까?"
김 대리의 노골적인 무시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하지만 허 과장은 대거리할 힘조차 없었다. 오늘 밤에도 '배달 콜'을 잡아야 카드 연체를 막을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2. 폭우 속의 질주
그날 밤,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폭우가 쏟아졌다. 배달 단가는 평소보다 높았지만 그만큼 위험했다. 허 과장은 빗물에 젖어 시야가 흐릿한 헬멧 실드를 연신 닦아내며 오토바이 핸들을 꽉 쥐었다. (결국 기름값을 아끼려 중고 오토바이까지 한 대 뽑은 터였다.)
"이번 건만 하면 오늘 목표액 달성이다."
마지막 배달지는 지역에서 가장 비싼 브랜드 아파트였다. 젖은 신발에서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비린내 나는 비 우천복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처량하다 못해 괴기스러웠다.
[띵동-]
"배달 왔습니다."
문이 열렸다. 그런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전혀 예상치 못한 얼굴이었다. 바로 팀장의 아내였다. 가끔 회사 가족 동반 모임에서 우아하게 웃으며 인사하던 그녀가 당황한 눈으로 허 과장을 바라봤다.
"어머... 저기..."
허 과장은 본능적으로 헬멧 실드를 내렸지만, 이미 늦었다. 그녀의 시선은 허 과장의 가슴팍에 달린 '허*'라는 이름표와 빗물에 젖어 엉망이 된 그의 얼굴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3. 가장 잔인한 아침
다음 날 아침, 사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허 과장은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어제 팀장 아내를 마주친 그 찰나의 순간이 이미 온 회사에 퍼진 것 같았다.
팀장이 허 과장을 조용히 옥상으로 불러냈다.
"허 과장, 자네 미쳤어? 대기업 과장이 밤에 배달을 다녀? 회사 품위는 생각 안 해?"
"팀장님, 그게 아니라... 사정이 좀 있어서..."
"사정없는 사람 누가 있어! 본사 인사팀에서도 이미 귀에 들어갔어. 겸직 금지 조항 위반이야. 이건 징계 사유라고!"
팀장의 고함보다 더 아픈 건, 멀리서 이 광경을 지켜보며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김 대리의 시선이었다. 대감집 노비로서의 자존심,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던 '대기업 직원'이라는 껍데기가 빗물에 씻겨 내려간 오물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4. 마지막 통보
자리로 돌아온 허 과장의 책상 위에는 인사팀에서 보낸 이메일이 한 통 도착해 있었다.
> [통보] 직무 수행 능력 부족 및 사규 위반(겸직)에 따른 인사위원회 회부 안내
허 과장은 멍하니 창밖을 보았다. 16년을 바친 회사가 그를 뱉어내려 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 진동이 울렸다. 카드사 상담원이었다.
"고객님, 이번 달 리볼빙 결제 대금이 부족하여 미납 처리되었습니다. 내일부터는 연체 이자가..."
허 과장은 휴대폰을 끄지 못한 채 책상 위에 엎드렸다. 18%의 이자보다, 팀장의 고함보다, 김 대리의 무시보다 더 무서운 건, 오늘 저녁 집에 가서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성실하게만 살면 정년은 보장될 줄 알았던 마흔 살 허 과장의 세계가, 완전히 박살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