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허무한 허과장

제9화: 노비 문서의 소각

by 흐릿한형체




1. 굴욕의 대기석


인사위원회 회의실 앞 복도. 허 과장은 16년 전, 첫 면접을 보던 날처럼 낡은 정장을 차려입고 앉아 있었다. 그때는 세상을 다 가질 것 같은 포부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도살장에 끌려온 짐승처럼 어깨가 굽어 있었다.


"허 과장님, 들어가시죠."


인사팀 직원의 차가운 안내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무를 비롯한 임원진 셋이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허 과장의 '배달 알바' 사진과 지난 3년간의 저조한 고과 기록이 놓여 있었다.


"허 과장, 16년이나 회사를 다닌 사람이 사규를 몰랐다는 게 말이 되나? 대외적인 이미지 실추는 어떻게 책임질 거야?"


상무의 질타에 허 과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지 실추? 내 인생은 이미 리볼빙 이자 18%에 실추될 대로 실추됐는데.' 속마음은 비명을 질렀지만, 겉으로는 "죄송합니다, 사정이 있었습니다"라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2. 김 대리의 제안


징계 심의가 끝나고 나오는 길, 복도 끝에서 김 대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말끔한 모습으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었다.


"과장님, 소식 들었습니다. 안타깝게 됐네요."

"안타까우면 그냥 지나가지, 왜 기다렸나?"

"실은... 본사에서 이번에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데, 과장님 명단에 넣으라고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징계 결과 나오기 전에 자진해서 쓰시면 위로금이라도 좀 더 챙길 수 있을 거예요."


김 대리의 말은 친절을 가장한 '사형 선고'였다. 회사는 그를 징계라는 명분으로 압박해, 퇴직금만 주고 조용히 내쫓으려는 계산이었다. 16년 동안 성실히 자리를 지켰던 대가는 '명예' 없는 명예퇴직 권고였다.


3. 가장 무거운 퇴근길


집으로 돌아오는 길, 허 과장은 차마 현관문을 열지 못하고 문밖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안에서는 아이의 웃음소리와 아내가 저녁을 준비하는 달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겨우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내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여보, 왔어? 어제 팀장님 사모님 만났다며? 왜 말 안 했어. 오늘 팀장님이 우리 집에 고기 보내주셨더라. 고생한다고..."


허 과장은 얼어붙었다. 팀장이 보낸 고기는 위로가 아니라 '작별 선물'이었다. 아내의 해맑은 표정을 보니 목구멍까지 차오른 "나 잘릴 것 같아"라는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세면대에 물을 틀어놓고 소리 없이 울었다. 16년 차 대기업 과장의 현실은, 쏟아지는 물소리에 울음소리를 감춰야 할 만큼 초라했다.


4. 0원으로 시작하는 계산기


밤늦게 거실 소파에 앉아 허 과장은 다시 계산기를 두드렸다. 명예퇴직 위로금과 퇴직금을 합치면 리볼빙 빚과 마이너스 통장은 청산할 수 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남는 건 0원, 그리고 마흔 살의 나이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만년 과장' 타이틀뿐이었다.

그때, 거실 구석에 놓인 낡은 배달 가방이 보였다. 어제 폭우에 젖어 아직 축축한 냄새가 났다.


'대감집 노비 문서가 불타버리면, 나는 무엇으로 살아야 하나.'


허 과장은 인스타그램 앱을 삭제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채용 사이트'에 접속해 자신의 이력서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16년 만에 처음으로 적어보는 이력서의 첫 줄은 이랬다. [경력 사항: 16년 동안 시키는 일만 함.] 눈물이 핑 돌았다. 하지만 그는 백스페이스를 눌러 글자를 지웠다. 이제는 진짜 '허 과장'이 아닌 '인간 허무'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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