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껍데기의 안녕
1. 사표, 가장 무거운 종이 한 장
인사위원회 결과가 나오기 전날, 허 과장은 밤새 거실에 앉아 흰 종이를 마주했다. 16년 전 입사 지원서를 쓸 때는 한 글자라도 더 채우려 애썼는데, 떠나는 길을 적는 ‘사직서’라는 세 글자는 허망하리만큼 짧았다.
다음 날 아침, 허 과장은 팀장의 책상 위에 사표를 올려두었다. 징계위원회에서 해고 통보를 받기 전에 스스로 선택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허 과장, 정말 이럴 거야? 위로금이라도 챙기려면 명예퇴직 신청서를 써야지, 이건 그냥 무단이탈이나 다름없어."
팀장의 걱정 섞인 비난에도 허 과장은 담담했다.
"팀장님, 16년 동안 대감집 밥 먹었으면 됐습니다. 더 이상 비굴하게 숫자를 구걸하고 싶지 않네요."
옆자리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김 대리의 눈이 커졌다. 언제나 굽신거리던 '무능한 과장'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허 과장은 처음으로 김 대리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짧게 목례하고 짐을 챙겼다. 16년의 세월이 단 한 상자에 담겼다.
2. 고백, 그리고 0원의 시작
그날 저녁, 허 과장은 아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식탁 위에는 통장 내역과 리볼빙 잔액 고지서를 모두 펼쳐놓았다.
"나, 회사 그만뒀어. 그리고 빚이 이만큼이야. 미안해. 정말 미안해."
아내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화를 낼 거라 생각했지만, 아내는 떨리는 손으로 남편의 거친 손을 맞잡았다.
"어쩐지... 요즘 밤마다 운동 간다더니 신발에서 비린내가 나더라. 당신 참 바보 같아. 왜 혼자 그러고 있었어."
아내의 눈물은 채권 추심 전화보다 따가웠다. 하지만 비밀을 털어놓은 순간, 허 과장은 16년 만에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비록 내일 아침부턴 대기업 과장이 아닌 '백수'이자 '전업 배달원'으로 살아야 했지만, 마음속을 짓누르던 18%의 납덩이는 조금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3. 노비 문서를 태우다
며칠 뒤, 허 과장은 퇴직금으로 우선순위가 급한 리볼빙 빚부터 청산했다. 통장 잔고는 순식간에 0에 가까워졌다.
그는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명품 코트 한 벌을 꺼냈다. 지난번 당근마켓에 팔지 않고 끝까지 남겨두었던, 그의 마지막 자존심 같던 옷이었다. 그는 그 옷을 헌 옷 수거함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배달용 헬멧과 형광색 조끼를 걸어두었다.
인스타그램 계정은 탈퇴 처리되었다. 이제 그에게 '좋아요'를 눌러줄 만 명의 인친은 없지만, 대신 현관문을 열면 반겨주는 가족과 정직하게 땀 흘려 번 하루치 배달 수수료가 있었다.
4. 에필로그: 진짜 나의 길
이른 새벽, 허 과장은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헬멧 실드 너머로 보이는 서울의 새벽은 차갑지만 투명했다.
'만년 과장' 허 과장은 죽었다. 이제 남은 것은 빚을 갚아나가며 제 손으로 인생을 다시 설계해야 하는 마흔 살의 사내뿐이다.
그는 배달 앱을 켰다.
[배달 파트너 62번, 업무를 시작하시겠습니까?]
허 과장은 주저 없이 '예'를 눌렀다. 오토바이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나아갔다. 대감집 담벼락 너머, 진짜 세상으로 향하는 첫 번째 질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