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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감 Jul 25. 2022

이 색으로 해 주세요

판교책방 글쓰기 모임 여섯째 날

오늘의 글: <스토너>

이렇게 꾸민 끝에 서재가 서서히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을 때 그는 오래전부터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비밀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이미지 하나가 묻혀 있었음을 깨달았다. 겉으로는 방의 이미지였지만 사실은 그 자신의 이미지였다. 따라서 그가 서재를 꾸미면서 분명하게 규정하려고 애쓰는 것은 바로 그 자신인 셈이었다.

중학생이 되기 전, 드디어 부모님이 집을 사셨다. 내 방이 생겼고, 그 집에 들어가기 전 다 같이 인테리어 업체에 갔다. 그 곳에는 어린 내가 보기에 아주 다양한 벽지 샘플, 타일 샘플, 장판 샘플 같은 것들이 가득했다. 부모님은 소파에 앉아 있는 내게 벽지 샘플이 묶여 있는 두꺼운 책자 같은 것을 펼쳐주었다. 이 중에서 네 방 벽지 하고 싶은 것을 골라보라고. 그 때, 내 방을 장식할 벽지를 고른다는 게 얼마나 신이 났는지. 이 집에 이사가기 전까지 집은 월세이거나 전세였고, 부모님은 절대 집주인에게 실례되는 일을 벌이고 싶어하지 않으셨다. 어린 아이들이 대개 그런 것처럼 나 역시 벽지에 펜으로 낙서를 할 잠재적 위험성을 갖고 있었지만, 부모님은 정말이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말씀하셨다. 이 집은 우리들의 집이 아니니 절대 벽지를 더럽혀서는 안된다고. 그런데 이제 우리들의 집이 생기고, 그 집의 내 방의 벽지를 내가 고른다니, 얼마나 큰 변화인지.

나는 옅은 꽃다발이 띄엄띄엄 그려진 흰색 바탕의 벽지와 푸른색과 흰색 줄무늬 벽지, 그리고 그 벽지 사이에 띠처럼 두를 벽지를 골랐다. 얼마 뒤에는 내가 고른 벽지가 발라진 내 방에 들어가볼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상상한 그 모습 그대로 벽지가 발라져 있는 방이 그렇게도 신기했다. 다시 이사를 가기 전까지 그 방의 벽지에는 발도 안 닿도록 조심했다.


얼마 전 지금 살고 있는 방의 벽지를 바꿨다. 깨끗한 벽을 좋아해서, 벽지는 살짝 울퉁불퉁한 질감이 있는 흰색의 것으로 골랐다. 책장과 책상, 모든 물건들을 밖으로 빼놓고 도배를 다시 했다. 아무것도 없는, 새로 발린 벽지 덕분에 환해진 방에 물에 적신 걸레를 들고 들어가 방 한가운데에 털썩 앉았다. 처음 내가 원하는 색의 벽지로 도배를 했던 방에 들어갔던 그 날의 그 신기함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런 비슷한 신기함을 느꼈다.

다시 책장과 책상을 넣고, 침대를 넣었다. 침대 위에는 내가 좋아하는 질감의 베개와 이불이 올려져 있다. 책장은 조금 밝은 연갈색의 나무로 맞춘 것이다. 책장에 들어가는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 버리기 아까운 책으로 고른 것이다. 다 읽고 두 번 다시 안 읽을 것 같은 책들은 중고서점에 팔았고, 언젠가 찾아볼 것 같지만 그다지 끌리지 않은 책들은 창고에 넣었다. 책장 한 쪽에는 내가 좋아하는 미피 인형이 앉아 있고, 그림 하나를 세워 놓았다. 책상에는 유리판을 까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나무의 질감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 나무를 팔로 문지르면서 가끔 나무의 질감과 온기를 느낀다.


세상에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많지 않다. 내 방을 나가는 순간부터 내 것은 내 몸에 두르고 있는 것, 내 가방에 들어 있는 것 정도 밖에 없다. 늘 밖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 사람들의 말과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내 의도와 노력과 결과물은 다른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늘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좋아하는 색의 벽지로 도배되어 있는 내 방이 나를 맞이한다. 밖에서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회적 규칙에 어느 정도 맞춰 놓은 옷을 벗어버리고 내가 좋아하는 부드러운 파자마를 입는다.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내가 좋아하는 감촉의 베개를 베고 내가 좋아하는 감촉의 이불을 품에 끌어안는다. 내가 좋아하는 색의 암막커튼이 밖과 나를 단절시켜준다. 침대에 누워 책장을 보면 내가 좋아하는 책들로 가득해, 일어나서 한 권을 빼보고 싶지만 그러기 전에 깜박 잠에 든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차 있는 작은 장소. 이 정도만 있어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많지 않은 세상으로 다시 나가기 위한 충전이 될 수 있는 것 같다. 처음 내 방의 벽지를 고르면서 이제 집주인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어린 시절에도 배웠던 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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