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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민 Nov 17. 2022

보건교사와 담임교사의 수능 준비

오늘은 2023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일. 여느 때 같으면 새벽같이 일어났을, 아니 혹시라도 일찍 일어나지 못할까 봐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시피 했을 오늘. 나는 지금 여유롭게 잉글리시 머핀을 먹고 있다. 별다른 사유가 없는 한 고등학교 교사들은 모두 수능 감독에 차출되는데 이게 무슨 일일까. 각종학교로 분류되는 우리 학교는 교육과정을 원활히 운영하기 위해 수능 날에도 어김없이 정규 수업을 진행한다. 일부 학과 학생들은 오늘도 학교에서 자격증 시험을 치르고 있고, 우리 반 아이들은 대부분 수능 시험을 치르러 새벽부터 나섰다. 고로 나는 9시 50분까지만 출근하면 되는 자유의 몸!


동기들은 모두 수능장 방역 준비로 고생스러울 것을 생각하니 조금 미안해지지만 나도 작년까지는 매년 수능 감독하느라 너무 힘들었다는 것ㅠㅠ 2019년 교직 첫 해에는 멋모르고 허둥대느라 바빴고, 2020년에는 전례 없는 코로나 덕에 시험 한 달 전부터 온갖 방역물품을 준비하느라 정신없었고, 2021년에는 제2외국어까지 치르는 거대학교로 배정되어 2,3,4,5교시를 풀로 감독해야 했던 슬픈 과거가 있단 말이다.


오늘은 그중에서도 쉽사리 잊지 못할 코로나 첫 해의 수능 준비 과정을 풀어볼까 한다. 때는 바야흐로 2020년 11월. 수능시험장에 필요한 방역물품을 구비하라는 공문이 왔다. 코로나로 개학이 연기되면서 수능 시험도 무려 12월에 치르게 되었던 그 해.


우리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은 모두 453명이고, 감독관도 100여 명에 이른다. 그래도 다른 학교에 비해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다. 수험생이 천 명이 넘는 학교는 감독관도 수백 명이니까. 아무튼 이 많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방역물품의 종류와 양이 상당했는데 구매 비용이 교육청에서 따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준비하라는 것이 문제였다. 


학교로 일부 금액이 배정되었다고 하는데 교무부에서는 그 돈으로 감독관 간식을 사야 하니 방역물품은 보건실 예산으로 알아서 구매하란다. 지금 같으면 그게 말이 되냐고 따졌겠지만 그때는 나도 처음 겪는 일에 너무 당황스러웠고, 다행히 코로나가 장기화되며 비축해 놓은 방역물품이 많아 그냥 알겠다고 해 버렸다. 


게다가 본부요원 중에 방역담당관이라는 업무를 부여받은 사람이 4명이나 더 있었지만 이들은 시험 당일날에만 일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지 도와줄 것이 있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결국 평소 방역업무를 지원해주시던 도우미 분과 둘이 30개가 넘는 방역물품 꾸러미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스크는 비말차단마스크와 KF-94 마스크 2종류, 손소독제, 비닐장갑, 라텍스 장갑, 환경소독제(책상, 의자 등 소독용), 소독티슈 등등. 종류도 다양하지만 기준도 까다로웠다. 비닐장갑을 준비하라고 해 놓고는 규격에 라텍스장갑이라고 적혀 있지를 않나, 소독티슈는 알코올 99.9%의 항균티슈(1팩에 50매 이상)를 준비하라고 아주 세세하게 요구하지를 않나. 교육청은 뭐 하나 나눠 준 것도 없으면서 맡겨 놓은 것처럼 당당하게 공문만 한 장 달랑 보냈다. 이렇게 세부 지침을 내릴 거면 차라리 물품을 일괄 구매해서 나눠주던가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지? 


초유의 사태에 수능이 평소보다 2주나 늦춰져 당황했을 수험생들을 생각하며 일단 최선을 다해 물품을 준비하긴 했지만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행정절차에 너무 화가 났다. 이것에 대해 나처럼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는지 다행히 올해에는 교육청에서 물품을 각 학교로 보내줬다고 하는데 그마저도 수량이 부족하다고 한다.


아무튼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찾아온 수능시험 당일. 혹시라도 유증상자나 확진자가 섞여 있을지 몰라 열화상 카메라를 설치하기 위해 다른 감독관들 보다 빠른 새벽 6시에 학교에 도착했다. 대중교통도 잘 다니지 않는 시간이라 엄마께서 운전해 주시는 차를 타고 도착했는데 나를 도와 하루 종일 고생할 인근 중학교의 보건선생님은 더 일찍 와서 방호복 4종으로 무장하고 계셨다. 


나도 얼른 방호복을 입고 페이스쉴드까지 착용하고 거울 앞에 서니 코로나 최전방에 선 전사가 된 기분이다. 추워진 날씨에 열화상카메라는 자주 오작동을 나타냈고, 그때마다 직접 고막 체온을 다시 재면서 수험생들을 입실시키기를 반복했다.


드디어 교문이 닫히고 1교시 국어시험 시작. 이제야 한숨을 돌리고 습기 찬 방호복을 벗어본다. 언제 유증상자가 생길지 몰라 마음을 놓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일단 큰 고비는 넘은 것 같아 안심이 된다. 교문 밖에서는 수험생 가족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무사히 시험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겠지. 그 마음을 잘 알기에 우리도 교실 안에서 소리 없이 조용한 전쟁을 치르고 있다.


담임이 된 지금은 보건실 대신 교무실에 앉아 있지만 마음속으로는 전국의 수능 감독 중인 선생님들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다들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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