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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라 Jan 20. 2023

같지만 또 다른 매력의 힘

カレーライス(카레라이스)

 난 초창기 ‘급식세대‘다. 국민학교로 입학해서 3학년이 될 무렵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고, 그즈음 급식도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도시락 통은 들고 다니기 귀찮았지만 엄마가 챙겨주는 점심을 친구들과 함께 먹는 그 시간이 즐거웠다. 제각기 반찬 내용도 달랐고, 같은 반찬이어도 맛이 달라서 골라먹는 재미가 있었다. (내 반찬이 잘 팔리면 어깨가 으쓱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다 갑자기 급식을 시작했고, 하나도 예쁘지 않은 식판에 모두 같은 점심 식사를 하게 된 것이다. 반찬은 세 개, 국과 반찬. 모두 같은 식단이니까 누구 반찬이 더 맛있느니 누가 밥을 못 먹느니, 그런 화젯거리는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한 마음으로 특별 식단이 나오는 수요일을 기다렸고, 매달 초 배부되는 식단은 언제나 이슈였다.


 매주 수요일에는 나름대로 학생들의 입맛을 겨냥한 식단으로 준비되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끽해야 카레라이스, 짜장밥, 돈가스 등에 열광했다. 하지만 난 카레가 나오는 날은 그저 그랬다. 급식 시간에 나오던 강황 냄새가 알싸하게 나는 노란빛 카레의 맛은 집에서 먹던 맛과는 영 달랐기 때문이다. 분명히 집에서는 연한 갈색빛에 고소한 냄새가 났더랬다. 그 당시 엄마의 지인이 일본 출장이 잦았는데 가끔 현지 소품과 먹거리를 가져다주었다. 그때 S&B 브랜드의 카레를 먹어보고 괜찮아서 우리는 수입 가게(미제 가게라고도 불렸)에서 종종 구입했다. 그 맛에 익숙해졌으니 노란 카레가 낯설 수밖에... 




 일본에서 카레는 우리나라에서 처럼 참 접하기 쉬운 음식이다. 그리고 모두 알다시피 '카레'라고 하면 일본카레가 빠지지 않는다. 편의점에도 카레 도시락이 위풍당당하게 진열되어 있고, 지나가다 간단하게 먹을 수 있는 유명한 카레 프랜차이즈 음식점도 있다. (하다못해 피자 바이킹에서 밥을 찾는 사람을 위해 한편에 카레 코너를 만들어 둘 정도다.) 


 내가 처음으로 카레를 사 먹게 된 건, 일본에 온 지 3개월이 넘었을 무렵 우연히 秋葉原(아키하바라)에 가게 되었을 때였다. 게임과 전자제품으로 유명해서 일명 '오타쿠'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성지였던 그곳. 뭘 그리 넣었는지 거북이 등껍질같이 두툼한 백팩의 가방끈을 바짝 올려 맨, 덥수룩한 머리의 안경잡이들이 정말 내 눈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뭐가 그리 바쁜지 저마다의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들을 실제로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새로운 곳에서 코 베이지 않으려고 했던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느라 슬슬 지쳐가고 있을 때쯤 배가 고팠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곳은 아주 작은 카레가게였다.


 가게에 들어서자 친숙한 카레 냄새가 풍겨왔고 카운터 식 테이블에 몇몇의 남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으... 그냥 나가야 하나.'


 여자라곤 찾아볼 수 없던 식당 분위기에 당황하고 어쩔 줄 모르던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어떤 사람이 먹고 있던 한 카레라이스였다. 그 카레 위에는 새우튀김이 올라가 있었는데 배가 고프니 그렇게 맛있게 보일 수가 없었다. 난 주문용 티켓 자동판매기에서 から揚げ(카라아게・닭튀김)가 올라간 카레라이스를 골랐다. (새우튀김과 닭튀김을 놓고 엄청 고민했었다.) 물을 마시면서 그 어색한 공기를 감당하고 있었다. 어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린 건, 배가 고프기도 고팠지만 혼자 식당에 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마 기다리지 않아 나온 내 카레라이스. 잔뜩 기대한 나의 카레라이스는 굉장히 단출했다. 그 흔한 감자도 당근도 들어있지 않은 카레에 몇 조각의 닭튀김. 간단히 말하자면 흰 밥 위에 걸쭉한 카레 국물이 부어져 있었던 것. 그런데 그 아무것도 없는 카레라이스는 뭔가 많이 들어있는 것 같은 풍미가 느껴졌고, 바삭한 닭튀김을 그 카레 국물에 찍어 먹으니 다 먹기 아까울 정도로 맛있었다.  분명히 많아 보이는 양이었는데, 어느 순간 마지막이 보이는 마법 같은 일까지... 어색함이란 잊은 지 오래였다. 나의 첫 내돈내산 카레의 추억은 그렇게 남아있다.




 나에겐 그때 맛본 그 카레의 맛이 참 인상적이었나 보다. 그것과 닮은 카레를 만들기 위해 레시피를 이것저것 찾아보았으니까. 결국 내 마음에 드는 레시피를 발견했고, 그건 우리 집의 카레라이스 맛이 되었다. 


 양파를 많이 많이 채 썰어 준비하고, 감자와 당근을 작게 깍둑썰기해둔다. 여기에 카레의 단맛을 좀 더 내 주기 위해 당근을 조금 갈아둔다. 이렇게 당근을 갈아 넣으면 맛도 좋지만, 아이들도 모르게 당근을 더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제 큰 냄비에 버터를 녹여서 양파를 약한 불에서 갈빛이 날 때까지 잘 볶아준다. 많이들 알다시피 양파를 오래 볶으면 달큼한 맛이 좋아진다. 그 맛이 카레의 풍미를 살려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닐까. 천천히 볶을수록 향도 좋고 부드러워지는데 단순한 작업이지만 정성이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렇게 양파가 적당히 잘 볶아지면 감자와 당근을 볶아준다. 감자가 투명하게 익어가면 물을 넣고 끓인다.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채수에서는 아직 루(roux)를 넣지 않았는데도 카레의 향이 나는 듯하다. 그렇게 끓은 채수의 불을 끄고 조각낸 카레 루를 퐁당퐁당 넣어 녹인다. 천천히 저어서 루를 녹이다 보면 어느 순간 걸쭉해지는 느낌이 든다. 그때 갈아놓은 당근을 넣고 약불에 조금 더 끓여준다. 아이들을 위해 우유나 휘핑크림을 조금 넣어주면 부드러운 맛이 참 좋은 카레로 변신 가능. 


 항상 같은 브랜드의 루를 쓰는 덕분인지 변하지 않는 맛 덕분에 카레를 만들면 딸내미들의 반응은 항상 좋다. 내가 한 일이라곤 재료 준비하고 끓이는 것뿐인데 엄청난 요리를 한 기분이 들어 뿌듯하다. 그리고 카레는 한 번 하면 적어도 다음 날 한 끼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엄마의 입장에서는 효자 식단이 아닐 수 없다. 먹어도 먹어도 변하지 않는, 오히려 더 진해지는 그 맛은 '뭘 먹을까.' 고민할 때 반짝 떠올라 모두를 도와준다. 


 "엄마 맛있는 냄새 나. 배고파졌어."


 카레는 내가 어렸을 때 그랬듯이 내 아이들에게도 집을 메우는 그 향기만으로도 군침을 돌게하는 음식이지 않을까. 혹은 언젠가는 어디선가 또 다른 신선한 비주얼로 놀라움을 전할 주인공이 될지도 모르겠다. 내가 모르는 멋진 카레를 또 만나길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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