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다. 엄마와 시어머니께선 자동차 뒷 좌석에 앉아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고 계셨다. 나는 창밖을 보는 척하며 두 분의 대화를 엿들었다. 그때 은은한 분노를 일으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대화 복원을 위한 참고-
친: 친정엄마
시: 시어머니
남편: Y
친: 요즘 텃밭 가꾸기를 하는데 정말 재밌어요. 채소가 쑥쑥 자라서 보는 재미가 있더라고요.
시: 호호. 저는 그런 데는 영 취미가 없어요.
친: Y가밭일을 얼마나 잘하는 데요.
시: Y가 밭일을 해요? 우리 아들은 밭일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친: 삽질도 아주야무지게 잘해요.
시: 저는 우리 아들들 힘든 일 절대로 안 시켜요.
당황한 나: Y가 언제 텃밭 일을 했어?
남편: 어머니. 저는 텃밭 일 안 했는데요?
친: 어머. 했잖아. 밭 두 개를 전부 다 땅 고르기 했어요. 일 시키면 얼마나 잘하는데요.
엄마의 기억은 단단히 왜곡된 상태였다. 텃밭에서고생했던사람은 주로남동생이었다. 나와 강아지와 남편, 일명 삼공주 무리는 텃밭에 가도 늘 시원한 정자 위에 머무르거나 차 안에서 동영상을 보며 놀았다.
딸은 시댁에 가서 김장 한 번 도와드린 적이 없건만 사위가 밭일을 잘한다고 자랑하시면 어찌하오리까. 나는 시어머니의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아 대화에 첨벙 뛰어들었다. 오보를 바로잡으려 노력했지만착각하신 엄마는 자꾸 반기를 드셨다. 엄마의 옆좌석에 앉았더라면 지긋이 옆구리를찔렀을 텐데.자동차 앞 좌석과 뒷좌석의 거리가 그토록 멀게 느껴진 건 처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서 아빠와 동생들에게 차 안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알렸다. 아니. 고자질했다. 모두 입을 모아 내 편을 들었다.
"자네는 왜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그래. 상대방의 말을 잘 들으면서 이야기를 해야지.그리고 언제 Y가 텃밭 일을 했는가? 자네 참 이상하네." 아빠의 발언에 기분이 좋아진 나는 옆에서 "그래. 맞아." 하며 맞장구를 쳤다. 마음이 상한 엄마께선 "작은 것 하나하나 눈치 보지 말고 행복하게 살아."라는 불멸의 명언을 남기셨다. 뉘에?
사실 위의 대화 내용을 제외하고 엄마께선그날 내내 '네 봇'이었다. 그리고 시어머니는'손주봇'이셨다. 무슨 말을 하든지 대화가 손주로 시작하여 손주로 마무리 됐다. "우리 애기는 뭐든 잘해요.", "우리 애기가 얼마나 말을 잘하는지 몰라요."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를 대신하여 엄마께선 계속 감탄사로 호응해 주셨다.
공원 어귀에서도 많은 대화를 나누셨던 엄마와 시어머니께서는 "오늘 너무 좋았어요.", "덕분에 제가 좋았죠. 또 만나요." 하시며 훈훈한 작별인사를 나누셨다. 두 분 모두 워낙에 솔직하신 반면에 말주변이 없으신 탓에 나만 괜한 긴장을 한 것 같았다.
자주 왕래하진 못하더라도 누구보다 응원하며 함께 늙어가는 관계, 나의 자식을 내어준 사이, 언제 봐도 반갑고 어려운 사이가 바로 '사돈'이 아닐까 싶다.이토록 소중하고 어려운 관계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시부모님은 며느리를, 친정부모님은 사위를 칭찬하는 것이리라.공원 벤치에 앉아 두 분께서 도란도란 말씀을 나누실 때 어머님은 나를, 엄마는 Y에 대한 칭찬을 많이 하셨다고 했다.
여름날의 짙초록 잔디와 파란 하늘, 우렁찬 매미 소리, 멀찍이 보이던 두 분의 마주 앉은 모습이 기억난다. 딸에게 언제나 "시댁에 잘하고 살아라."라는 다부진 응원 멘트를 읊으시는 엄마의 마음이 오늘따라 투명하게 와닿는다. 잘하고 산다는 게 뭔지 아직도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남편의 사랑을 나침반 삼으면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상 시댁과 친정의 정상회담 회의록을 마친다.당분간은한집 방문 서비스만을 제공하기로 결정했음을 은밀히 알리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