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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 뼘 수필 Oct 16. 2024

찔레4

2024 김장생 신인문학상 수상작

  긴 하루였다늦여름 저녁의 숙지지 않은 빛살이 부챗살처럼 번지는 낡은 담장 위에서 능소화가 농염한 미소를 흘리고 있다. 그 아래 차를 댄 그는 집 쪽으로 걸어가면서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세월만큼 부스러지면서도 오래 살아 숨 쉬고 있는 집. 걸핏하면 원룸을 지어대느라 허물고 불도저로 밀고 먼지와 소음이 넘치는 동네에서 그래도 집이 스스로를 잘 지탱하고 있는 게 아내의 등처럼 든든했다. 손이 가지 않은 항아리들은 비었고 사용하지 않는 빨랫줄도 삭아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지만 어쩌다 남아 있는 색 바랜 빨래집게가 바람에 흔들리면 그게 또 애잔해서 한참 눈이 머물곤 했다. 

 아내는 이 집에서 행복했을까? 사회라는 정글로 사냥을 떠나는 자식과 남편이 더 먼저였겠지. 빈손이건, 먹잇감을 둘러맸건, 그들이 돌아올 때면 편히 쉴 수 있는 즐거운 집이 되도록 애써왔겠지. 그러는 동안 집은 선량한 한 사람의 쉼 없는 노동과 헌신의 장이었을 뿐, 정작 아내가 주체였던 적이 있었던가. 그는 몰랐다. 아내도 몰랐다. 모르는 것도 몰랐다.     



사진: 이영환 작가


  그새 학원을 갔다 왔는지, 앞집 대문 앞에는 중이가 서 있다. 어떤 남자아이와 함께 캔 음료를 마시면서. 들어가는 길인지 나오는 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잊지 않고 사료를 챙겨 내린 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이돌처럼 비쩍 마르고 예쁘장하게 생긴 남자애가 그를 빤히 쳐다봤다. 

  “벌써 학원에서 온 거냐?”

  그가 사료를 건네며 말했다. 궁금해서 물은 건 아니고. 중이가 사료를 받으려는 순간 갑자기 남자애가 낚아챘다. 남자애는 눈을 부라리며 씨근댔다.

  “할아버지가 뭔데 얘한테 이런 걸 막 주고 그러세요?”

  중이가 재밌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남자애와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왜 그러냐?”

  피곤한 그가 무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할아버지가 뭔데 차 태워주고 점심 사 주고 이런 것까지 주냐고요. 친할아버지도 아니면서.”

  전의를 불사르듯 남자애가 사료를 흔들어 대면서 딱딱거렸고 중이는 그런 남자친구가 기특한 모양이다. 웃음살이 얼굴 가득 번졌다. 그는 성가셔서 말없이 돌아섰다. 그러나 중이의 웃음에 고무된 남자애가 돌아서는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팔 대신 무릎이 비명을 질러댔다. 한 손에 들고 있던 장모의 반찬 보따리가 흔들렸다. 남자애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달려들었다.

  “얘한테 관심 끄라고. 학원을 갔다 왔든 말든. 존나, 재수 없어.”

  골목을 지나던 행인이 힐끗 돌아봤다. 그는 씩씩대는 아이를 물끄러미 봤다. 별다른 감정이 일지 않았다. 세상에 널린 추한 오해라 할지라도 아이를 나무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내를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보다 낫지 않은가. 적어도 이 어린놈은 여자친구를 위해 위험한 대거리라도 하고 있지 않은가. 마침 퇴근해서 돌아오던 중이 엄마가 소리를 질렀다.

  “너, 뭐야. 어른한테 싸가지 없이.”

  남자애가 후다닥 도망갔다. 중이가 새침하게 들어갔다. 중이 엄마는 그에게도 따끔하게 말했다.

  “아저씨도 이제 우리 애한테 사료 같은 거 주지 마세요. 우리가 뭐 개 한 마리, 거둬 먹일 형편이 안 돼서 가만히 있은 줄 아세요? 그 댁 아주머니가 저의 어머님 편찮으실 때 가끔 들여다보셨고 뭉치 간식도 주셨는데 돌아가셔서 이제 아저씨가 그러나 보다, 했던 거죠. 근데 애들도 이상하게 생각하잖아요. 괜한 오해받는 거, 우리도 싫어요.”


  한 방 얻어맞은 그는 다리를 질질 끌며 집으로 들어왔다. 장모의 반찬통에서 큼큼한 냄새가 났다. 그는 보따리 그대로 냉장고에 넣고 씻지도 않은 채 털썩 주저앉았다. 대체 아내는 어떤 사람이었나. 누구보다 아내를 잘 안다고 여겼는데, 아내의 어디를 바라보고 기대며 살았던 걸까. 그는 씀벅거리는 눈에 인공눈물을 넣었다. 이제 찔레 먹을거리는 어쩌나, 서걱거리는 눈에서 보리알 같은 눈곱이 나왔다. 

  작은아들은 오늘 들어오지 않을 모양이다. 큰아들은 아침나절 얼굴 한번 삐죽 내밀었으니 당분간 소식이 없을 것이다. 자식들의 미래에 그는 없다. 물론 이 순간에도. 빽빽한 외로움이 텅 빈 그의 몸을 휩싸 안았다. 아무리 떼어내도 더운 바람이 자꾸만 휘감겼다.

  밤은 오려나? 이렇게 뜨거운데. 담배를 꺼내려고 가슴팍을 뒤졌다. 아, 담배 끊었지. 그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가슴도 치고 무릎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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