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은혜 Jun 17. 2022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귀스타브 플로베르, 『성 앙투안느의 유혹』, 열린책들, 2010

시인들과 광대들


(…중략…) 가짜 다이아몬드가 진짜보다 빛나지. 분홍 타이즈가 흰 엉덩이에 비길 만하지. 가발이 숱 많은 머리털보다 길고, 기름을 먹이면 똑같이 향이 나고, 파마를 하면 똑같이 우아하고, 햇살이 비치면 금속성 광택이 똑같이 영롱하지. 화장분이 강렬한 격정으로 뺨을 부각시키고, 잔털의 유혹이 간통을 부추기고, 저잣거리에서 춤을 출 때 우리의 낡은 옷에 달린 금장식 줄이 바람에 펄럭이는 걸 보며 인간사의 허망함에 대한 철학적 생각을 떠올리게 되지.



귀스타브 플로베르, 『성 앙투안느의 유혹』, 김용은 역, 열린책들, 2010, 291쪽


햇볕이 너무나도 뜨거웠는지, 구름들마저 그늘을 찾아 사라진 새파란 5월에 친구가 갑작스레 하늘로 떠나버렸다. 친구도 자신이 있던 곳이 너무나도 뜨거운 나머지 자신만의 그늘로 피해버렸을 것이다. 웬 작정을 그리도 빨리 결정했는지, 티 하나 안 내고 가버린 Y가 나는 너무도 야속하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지만, 나는 과연 Y의 선택이 정말 순수한 의미에서의 자살인지 의문스럽다.


우리가 사는 세계 속에는 수많은 이데올로기가 삶의 규범과 양식으로 자리하고 있다. 큰 범주에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있고, 그 외에 사회·문화·경제적으로 다양한 층위의 이데올로기들이 있다. 그중 사회적인 이데올로기의 예를 들어보자. 여성의 흡연에 대한 시각에도 이데올로기는 존재한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길거리에서도 담배를 태우며 갈 정도로 여성들의 흡연이 일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프랑스와 다른 생활 문화 때문인지 남성 흡연자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반면, 여성 흡연자들에게 간혹 좋지 않은 시선을 던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측면에서 보자면 나의 친구 Y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다. 군대는 질서 유지가 필요한 특수사회라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적인 억압과 모욕적인 폭력이 있을 수도 있다는 식의 이데올로기 말이다. Y는 입대한 뒤로, 선임들의 이유 없는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듯한 조롱과 모욕, 폭력은 군대사회의 이데올로기에서 일종의 ‘통과제의’이자, 당연한 질서유지 수단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의 남자가 되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 존재에게 수치심과 모욕을 안겨주는 폭력이 과연 질서유지에 유의미한 행위인가? 대개 이런 경우, 가해자들이 일차적으로 드는 반박은 “과거에도 그래왔다”, “원래 군대사회가 그렇다” 는 식이다.


내일의 변화가능성이 전제되지 않은 오늘은 지옥과 다름없다. 과거에도 그래왔으니 오늘날에도 그래야한다는 논리는 상당히 모욕적이다. 광주민주항쟁도, 지난 겨울의 뜨거웠던 촛불시위도 무기력하게 만드는 잔인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흔한 일이라고 해서 여전히 자행되어야 할 일은 아니지 않은가.


군대사회가 원래 그렇다는 말은 또 얼마나 타성에 젖은 말인가. 한국의 근대사를 보면 한국의 문화는 일면 군대 문화가 깊이 스며들어있다. 굳이 회사나 일상의 예가 아니더라도, 지난 해 프랑스 나시옹 광장에서 농민들이 트랙터 시위를 경찰의 호위 아래 잘 치른 것에 비해, 우리 경찰들은 농민들의 상경을 막고 유혈사태를 빚지 않았는가. 이것이 바로 유신정권의 잔재가 여전히 존재하는 방식이다.


나는 나의 친구 Y가 물리적으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지라도, 사회적 타살을 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Y가 죽기 전, 우리에게 한 말과 정 반대로 진술을 한 이등병 동기도, 가해자 선임들도 모두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은 조금만 참으면 될 것이다. Y가 목숨을 끊은 화장실을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고, Y의 침상이 빈 채로 있는 것을 매일 마주하면서도 그들은 참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21개월을 버티고 나면, 그들은 사회에서 반듯한 청년들로 살아갈 수 있다. 가짜 다이아몬드가 진짜보다 빛나고, 가발이 숱 많은 머리털보다 길고, 가짜 아들, 가짜 학생, 가짜 남편이 진짜보다 더욱 빛나고 아름다울 것이다.


아마도 우리가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은 유토피아로만 남아야할 듯싶다. 유토피아는 그것의 부재가 전제될 때에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가는 방법이 죽음뿐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Y는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한 이상향으로 남아버렸다. 그는 우리 기억 속에 언제나 맑은 청년의 모습으로,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에도 없는 사람이 되었다.


친구야, 바람은 우리 안에서만 거셀 뿐, 세계는 그대로가 아니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