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감정들이 하나로 융화되는 순간
딩글을 떠나 코네마라를 향해 가는 길, 지도에서 귀여운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외마디 마을 이름은 좀처럼 보기 드문데 마을 이름이 콩(Cong)이라니 '여긴 도대체 뭘까'. 맑은 물이 넘치듯 흐르고 숲에 둘러 싸인 작은 이 마을에 방문한 계기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시작됐다.
콩은 1962년에 개봉한 아카데미 수상작 'The quiet man(국명 : 말없는 사나이)'의 영화 촬영지였다. 주인공의 집, 클락 삼촌의 집 등등, 영화 속 흔적들이 60년 동안 충실하게 유지되어 왔다. 심지어 'The quiet man' 영화 박물관이 작디작은 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영화 그 자체의 마을이다.
그 시절 사람이 아니라 그 영화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와닿진 않았지만 이런 작고 조용한 마을 하나가 오랫동안 그 기억들을 유지하는 걸 보니 굉장히 사랑받은 영화였나 보다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옆에는 밥 아저씨 그림에 나올 법한 아름다운 풍경에 숲이 있었다. 숲 속을 산책하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코네마라를 향해 떠났다.
작고 조용한 마을 클리프던에 도착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장을 보거나 마을을 구경하며 느긋하게 지냈다.
마을의 크기는 두 블록 정도, 중심거리는 600m가 채 안 되는 아주 작은 시골 동네다. 하지만 그동안 거쳐온 그 어떤 도시와 마을보다도 많은 펍과 고가의 편집숍들이 몰려있다. 도대체 사람도 보기 힘든 이 작은 마을에 뭐 볼 게 있어서 이렇게 밀도 높은 번화가가 생겼을까. 해가 지고 펍을 가보니 그 비밀이 풀렸다.
낮에는 다들 어디에 있었던 건지 수많은 미국인들이 밤만 되면 하나둘씩 나타나 펍으로 몰려온다. 실제로 미국인들과 대화해 본건 처음이었다. 인구의 90%가 인싸 기질을 타고난다던 자유의 천조국의 명성은 틀리지 않았다. 등장과 동시에 미쿡인 아주머니가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으며 소란스럽게 나타났다. 아이리쉬 헌팅캡을 70% 할인가에 샀다며 의기양양하게 자랑한다. 아이리쉬 소울을 장착한 그 무리들은 펍에 온 모든 사람들과 친해질 기세다.
우리는 외딴 마을에 처음 보는 낯선 동양인이라 모두의 관심 대상이었다. 헌팅캡 아주머니는 나와의 대화도 모자란 지 다른 테이블 사람들에게 우리를 소개하며 판을 키웠다. 직업을 묻길래 답을 했을 뿐인데, 어쩌다 자녀가 생물학자라는 것까지 알게 됐을까...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덕분에 그들의 텐션에 휩쓸려 잊지 못할 아이리쉬 펍의 기억을 새겼다.
아일랜드 최서쪽, 골웨이에서 한 시간 정도 더 들어가면 클리프던을 중심으로 위로는 커다란 산맥이 깊게 뿌리내린 코네마라 국립공원이 있다. 아래로는 스카니브호, 볼라드호를 포함한 셀 수 없는 무수한 습지가 드넓은 평원에 펼쳐져 있다. 이 두 개의 산악지대와 습지대를 둘러싸고 그 주변을 연결하는 거대한 무한궤도의 도로를 일컬어 코네마라 루프라 부른다.
하단의 습지대에는 끝없이 펼쳐진 초원지대 초입부에 핑크웨건 푸드트럭이 눈길을 끈다. 빵 사이에 감자칩 과자를 끼워 먹는 조금은 괴랄한 메뉴가 있지만 대체로 훌륭한 샌드위치를 판매하는 매력적인 곳이다.
과거 비행기 공장이 있던 터를 고스란히 살려 습지대와 어우러진 야외 박물관을 돌고 나왔다. 루프 최하단 작은 반도의 조용하고 평화로운 바다, Dog's beach를 끝으로 하루를 마쳤다.
상단에 거대한 산 외곽을 따라 킬리모어 수도원을 돌아 우측 끝자락 리넌 마을에 들렀다. 아일랜드에 단 세 곳밖에 없는 자연지형인 바다로 이어진 V협곡 - 사회과부도 교과서에서만 보던 - 피요르드를 마주했다.
돌아오는 길, 커다란 코네마라 산을 등지고 드넓게 펼쳐진 초원과 숲을 가로질러 돌아갔다. 문득 지난 여정의 감정들이 하나둘씩 스쳐간다. 가슴 벅차고 좋았던 감정, 슬프고 우울했던 감정들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양립할 수 없을 것 같던 두 개의 감정들이 하나로 융화됐다. 오직 고요함 만이 남은 듯이. 길 위에 잠시 멈춰 서서 이렇게 긴 여행을 할 수 있음에 다시 한번 서로를 감사히 여겼다.
대지의 굴곡을 따라 끝없이 길이 이어졌다. 우리는 그 길을 자유롭게 뛰었다. 저만치 멀리서 걷고 있는 지수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긴 여행을 떠나오는 동안 나로 인해 다치기도 하고 화도 많이 났을 텐데 가벼운 발걸음을 보니 괜스레 맘이 놓였다. 이 순간 지수와 함께라서 행복하다. 온 마음을 다해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음에 감사하다.
2014년, 헌신이 무엇인지 절실히 알게 된 순간이 있었다. 대학원 3학기쯤 봄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날은 우중충했고 때 아닌 형의 전화가 왔다. “엄마가 많이 아픈 것 같아, 지금 바로 올 수 있어?”
1년 전부터 급격히 몸이 쇠약해진 엄마는 병원을 가도 원인을 찾을 수 없었고 매일을 작은 걸음에도 숨을 헐떡이며 식은땀을 흘렸다. 불안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집에 왔을 때 엄마는 의식을 간신히 붙든 채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급히 가까운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각종 검사를 받으며 하룻밤을 보냈다. 정확한 원인을 찾을 수 없었던 동네 병원은 큰 병원으로 갈 것을 권유했다. 생각할 겨를 없이 응급차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생사가 오고 가는 응급실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희미한 의식의 틈으로 내 손을 잡고 있는 엄마를 보곤 아무 일도 아닌 척 태연함을 연기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또다시 수많은 검사가 반복됐고 마침내 의료진은 보호자를 찾았다. 내가 가질 수 있는 최대한에 침착함으로 의사를 마주했다. 보호자 신분으로서 진단명과 병환의 진척 수준, 수술방법과 생존확률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각종 위험부담에 대한 책임 서명과 수술 진행 여부가 내 결정에 달렸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곤 어머니라는 존재가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영원할 수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수술 동의를 한 다음 저린 마음을 붙잡고 엄마를 찾았다.
"엄마 죽는대?", "아녜요. 엄마 별거 아니래요", "엄마 어디가 아프대?", "..."
의사에게 들었던 진단명과 수술방법을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 가슴을 열고 심장을 잠시 정지시킨 다음 상박 대동맥을 교체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로 꺼낼 수 있을까. 간신히 울먹임을 참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밥은 먹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터져 나오는 울음을 막느라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엄마가 죽게 생겼는데 그게 지금 뭐가 중요해요..." 말을 잇지 못하고 곧장 화장실로 뛰었다. 깊은 수심에서부터 몰려오는 감정의 일렁임은 엄마의 말 한마디로 요동쳤다. 결국 굳게 틀어막고 있던 둑이 와르르 무너졌다. 참아왔던 울음을 쏟아냈다. 살면서 그렇게 서럽게 펑펑 운 적이 있을까. 생사의 문턱을 넘나드는 당신의 목숨보다도 못난 아들내미의 뱃속에 안녕이 더 궁금한 게 엄마였다.
마음을 다독이고 문 밖을 나와 아버지와 형, 가까운 친인척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 길로 엄마는 수술대에 올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평소 먼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에게 덕을 베풀라는 소신으로 살아오신 덕일까. 지옥 같던 밤이 지나고 엄마는 무사히 수술을 마쳤다. 또다시 보호자로서 수술 결과와 향후 치료과정, 후유증에 대해 설명을 들었고 나는 몇 번이고 깊은 감사를 표했다.
중환자실에서 3일간에 회복기를 가지고 나서야 엄마를 볼 수 있었다. 온몸엔 관이 꽂혀있고 알 수 없는 기기들과 연결돼 있다. 우리가 온 것을 알아챈 것일까 실눈을 뜨곤 온 힘을 쥐어짜 내 말했다.
"...밥은 먹었어?"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또다시 화장실로 뛰어가 펑펑 울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끝까지 엄마를 돌볼 거다' 그날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일주일 뒤 엄마는 회복실에서 일반병실로 옮겼다. 한 달간의 간병생활을 위해 한 학기를 포기했고 졸업은 1년이 미뤄졌다.
엄마는 매일 새벽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잠에서 깨어나 소변을 봤다. 몸에는 양쪽에 두 군데씩 총 네 군데에 관이 삽입돼 있었고 알 수 없는 기계장치들이 함께 했지만 그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매 새벽을 뛰쳐나갔다. 나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엄마보다 빨리 일어나야만 했다. 기척이 들리면 재빨리 일어나 부축을 하고 관이 뽑히거나 다치지 않도록 기기들 챙겨 함께 끌고 나와 엄마를 화장실로 데려갔다. 소변량 체크를 위해 변기에 계량 통을 깔고 바지를 벗겨 소변을 도왔다. 옷을 입히고 침상에 눕힌 다음 다시 화장실로 돌아가 소변량을 기록하고 나서야 자리에 누웠다. 부족한 수면량에 날이 갈수록 지쳤다. 낮에는 수술 후 일시적 치매 증상인 '섬망'으로 아기가 된 엄마의 욕설을 버티며 꿋꿋이 자리를 지켜야 했다. 어떻게든 엄마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날의 다짐이 아니었다면 버티기 힘들었을 거다. 하지만 이주일이 지나고 나니 내 정신상태도 피폐해졌다.
매일을 잠도 못 자고 돌본 게 누군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을까. 너무나 서운한 마음에 차마 자리를 떠나진 못하고 등을 돌아누웠다. 굳은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여전히 화장실을 갈 때면 욕을 먹더라도 거들어야 했다. 나는 우리 가족 중에 아무것도 아니었을까. 왜 나만 이러고 있어야 할까. 온갖 잡념과 후회가 밀려왔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화가 났다. 다 내려놓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때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30년 동안 나는 부모님 가슴에 셀 수 없는 대못을 박아왔는데 고작 한 달, 조금 고생한 것 가지고 욕받이 된 게 뭐가 대수냐', '나는 화를 낼 자격이 없다', '그동안 부모님이 나에게 주신 헌신에 비하면 지금 이 순간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시절을 보내고 나서야 나는 헌신에 대한 정의와 깊이를 더듬을 수 있었다.
타인이 나에게 어떠한 마음에 경계를 세우지 않고 완전히 무장해제한 채로 날 반겨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생각했다. 특히 그것이 부모님이 아니라 피 한 방울 안 섞인 다른 이에게서 받았다면 그것은 사랑의 존재를 목격한 것이다. 당시 나는 지수와 헤어진 지 일 년이 넘었고 어머니를 간호하고 나서야 지수의 사랑을 알아챘다.
연애시절, 약속 장소에서 만날 때면 지수는 어김없이 포옹으로 인사했다. 연애할 돈이 없어서 만나기 부담스럽다고 고백했을 때 지수는 도시락을 싸왔다. 지수는 허약했지만 매일 4~5km를 나와 함께 걸으며 배고픈 연애를 했다. 나는 지수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받았었다. 그 후로 기적처럼 다시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결혼을 했다. 우리는 지금 코네마라 루프를 걷고 있다.
지수가 뒤를 돌아 나를 바라봤다. 옅은 미소가 보인다. 우리 사이에는 미소만 오고 갔지만 그 공백에서 나는 사랑을 느꼈다. 잠들기 전 갑자기 떠오른 옛날 일로 예상치 못한 화를 낼 때도, 힘들다고 하소연할 때도 사랑을 발견했다. 코네마라 루프 위, 나는 그곳에서 사랑의 존재를 확인하고 다시 한번 헌신에 대해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