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판왕 #1

끝판왕을 깨려면 이 정도 고통은 견뎌야 해

by 우지



'아, 바지가 뜯어져 버렸네.'

8시 50분 바쁜 걸음을 재촉하며 지하철 계단을 오르던 나는 허벅지 쪽이 쓸려 뜯어진 청바지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1년을 더 입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하고는 다른 사람에게 보일까 얼른 긴 상의 지퍼를 올려 황급히 허벅지를 가렸다.


간신히 8시 59분 출근 도장을 찍은 나는 바지가 뜯어져 버린 것도 잊은 채 업무를 해결하고 오늘도 구내식당에 가서 점심을 해결한다. 점심 식사 후 동료들이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지만 당기지 않는다며 먼저 들어가 보겠다고 말했다.


동료들이 익숙하다는 듯 커피를 사러 떠난 후 나는 사무실에 들어가려다 문득 바지를 하나 살까 하고 근처 옷 매장에 들어갔다. 마침 30프로 세일을 하고 있어 득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쁜 옷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고 마침 마음에 드는 바지가 있어 피팅룸에 가서 입어 보았다. 바지를 입어보니 그냥 봤을 때 보다 더 마음에 쏙 들었고 홀린 듯 계산대 앞으로 갔다. '3만 5천 원입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났다. '3만 5천 원이면 구내식당밥을 7번은 먹을 수 있는 돈인데...' 나는 슬며시 바지를 원래 있던 자리에 걸어 두고 황급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동료들이 하나, 둘 테이크아웃 커피잔에 음료를 들고 들어 온다. 커피잔의 얼음 소리가 요란하다. 자기들끼리 킥킥 거리며 귓속말을 하는데, 이제는 뭐 궁금하지도 않다. 오후 업무에 집중하다 커피 생각이 나 서랍에 고이 간직해 뒀던 인스턴트커피를 꺼냈다. '날짜가 하루 지나긴 했지만 먹어도 괜찮겠지?' 탕비실에서 커피를 타며 나는 '오늘도 5천 원 아꼈다. 잘했어 김주미'라고 중얼거렸다. 아무도 들리지 않게 나 혼자 주문을 외우듯 읊조리며 커피를 타 마시는데 오늘따라 커피 맛이 씁쓸하다. 기분 탓인가 하다 탕약 마시듯 커피를 후루룩 입 안에 털어 넣고 얼른 자리에 앉았다.


감정의 변화가 오기 전 얼른 가계부 어플을 켜 오늘의 지출 식비 오천 원을 작성했다. 하루 8천 원 쓰기 미션을 오늘도 성공했다. 성공의 기쁨에 취해 있다 보니 아까 먹은 쓴 커피맛이 뿌옇게 희석된다. 물론 이런 내가 궁상맞고 초라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지금 게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끝판왕을 깨려면 이 정도 고통은 견뎌야 해.'라고. 하지만 문득 그 끝판왕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솟구치느 날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내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삼 남매의 첫째로 태어난 나는 그리 넉넉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랐다. 10원짜리 한 장도 허투루 쓰지 않는 엄마를 보며 친척들에게 용돈을 받으면 곧바로 쓰지 않고 무조건 돼지저금통으로 달려갔다. 엄마가 돈을 허투루 쓰지 않으니 마트에 가면 나도 먹고 싶은 게 있어도 말할 수가 없었고 그 시절 나는 목욕탕에서 파는 바나나 우유를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하지만 바로 밑 여동생은 마트에 가서 엄마에게 이거 사달라 저거 사달라는 말도 잘했고 엄마가 사주지 않으면 마트에 들어 눕기 시전을 하기도 했다. 또 언젠가는 내가 고이 모아 놓은 저금통의 돈을 털어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가기도 했는데 동생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친구들에게 실컷 생색내고 난 뒤 나에게 돌아온 건 그저 미안하다는 말뿐.

누구도 다시 나의 돈을 채워주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로 그동안 먹고 싶은 것을 참고 절제해 온 나의 노력과 세월이 허공에 사라지는 허망함을 느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