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책이 있다. 너무 보고 싶은데 마지막 장을 덮기가 두려워 읽기를 미루게 되는. 나의 경우 1달 전에 구매한 소설 2권이 그랬다. 가장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라 책의 제목도 보지 않고 빛의 속도로 장바구니에 담았고, 배송받은 지 4주가 다 되어가지만, 차마 펼치지 못한 책들. 김애란의 '이 중 하나는 거짓말'과 정유정의 '영원한 천국'이다.
오늘 나누고 싶은 책은 정유정의 '영원한 천국'이다. 개인적으로는 최애작가 중 한 명이지만 책을 받는 순간 조금 위축이 되긴 했다. 벽돌(두꺼운 책)을 연상케 하는 비주얼은 흡사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경험상 우리나라 장편소설 중 500 페이지를 넘기는 책은 그리 흔하지 않다. 무슨 하고 싶은 말이 그리 많아 책이 이리도 두꺼울까 싶었지만, 정유정의 장편소설을 꾸준히 읽어온 독자라면 사실 새삼스럽지도 않다. <종의 기원>, <7년의 밤>, <완전한 행복>, <28> 등 그녀의 장편소설은 대부분 500p에 육박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얇은(?) 김애란 작가의 책 보다 첫 장을 펼치기까지 시간이 더 오래 걸렸지만, 정유정 작가의 다른 책들이 그랬듯 첫 장을 펼치는 순간 폭풍 같은 이야기 속에서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영원한 천국. ⓒ은행나무
소설가 장강명은 '정유정 작가는 마에스트로다'라는 말을 남겼다.
독자의 피를 끓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가슴을 아리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고, 깊은 철학적 고민에 빠뜨리고 싶으면 그렇게 하는, 자신이 원하는 소설을 쓰기 위해 SF든 미스터리든 스릴러든 러브 스토리든, 원하는 장르를 모두 가져와 각각의 문법을 그래도 지키면서 잘라 붙이고 이어 '정유정'이라는 장르를 만들어 내는. - 장강명 (추천사)
이에 깊이 공감하며 추가로 덧붙인다면, 그녀의 소설은 '롤러코스터'와 같다. 책을 펼치는 순간 끝을 보기 전까지는 단 1초도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늘까지 치솟았다가 바닥까지 침잠하는, 한 순간도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드는 그녀의 작품은 무척 강렬하면서 읽는 데 많은 체력을 요구한다.
사방에서 서서히 조여 오는 압박감을 느끼며 책을 읽노라면, 내가 텍스트를 읽는 건지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건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늦은 새벽까지 몰입해서 책을 읽다 보면 다음날 일상에 꼭 영향을 받는다. 온몸을 휘어 감는 전율과 긴장감, 거침없는 서사는 꿈속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이해, 내면을 파헤치는 그녀의 소설에는 늘 죽음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죽음 이외에 달달한 사랑이야기도 나온다. 물론 전체적인 분위기가 막 밝고 블링블링한 건 전혀 아니지만, 정유정 덕후로서 기존에 경험해보지 못한, 아주 새롭고 흥미로운 느낌이었다. 감정과 느낌보다는 사실과 묘사 위주의 다소 건조해 보이는 문장들로 이런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것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가끔 등장하는 '정유정표 위트'도 빼놓을 수 없다. 그녀의 소설은 독자로 하여금 긴장하게 만들면서도 웃음을 자아내는 맛이 있다. 500페이지가 넘는 만만치 않는 분량이지만, 이런 소소한 재미가 있어 더 쉽게 읽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번 [영원한 천국]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지만 깨알 같은 위트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고작 3천 자 내외의 글을 하나 쓰면서도 '하나의 주제'라는 방향을 유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500쪽이 넘는 이 두꺼운 책은 내용이 복잡하거나 어수선하지 않다. 장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몰입하게 만든다. 묵직하고, 강렬하며, 간결하다. 필요 없는 인물이나 서사가 조금도 없다.
보는 관점에 따라 이 책의 키워드를 달리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래, 과학, 인류, 사랑, 죽음 등. SF스릴러물의 느낌이 물씬 풍기지만 정작 정유정 작가는 과학에 대한 지식이 무척 얕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과학도 잘 모르는 사람이 이런 책을 쓰냐'라고 불만을 가질 수도 있을 거라고 하며.
하지만 그녀는 비록 과학적인 지식은 부족하나 '상상력'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고 말한다.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 통찰과 함께 더해진상상력은 그녀를 단순한 작가가 아닌 마에스트로로 만든다. 롤러코스터 못지않은 강렬한 책을 써내게 한다. 고작 상상력이라니, 아주 어릴 때나 듣던 단어였는데. 별거 아닌 듯한 이 추상적인 단어 하나로 K소설의 정점에 우뚝 서있는 그녀가 멋지고 자랑스럽다.
소설가들은 저마다의 고유한 특성이 있다. 누군가는 기자라는 경력을 되살려 데이터와 자료가 풍부한 글을 쓴다. 누군가는 자신의 삶을 소재로 삼으며, 심지어 자신의 부모를 등장인물로 대놓고 내세우는 작가도 있다. 끊임없이 전투적으로 책을 출간하는 작가가 있는가 하면, 잊을만하면 신작을 발간하는 작가도 있다.
정유정은 이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그녀의 작품은 폭풍처럼 강렬하다. 일단 한 번 펼치면 끝장을 봐야 하기 때문에, 만약 그녀의 책을 읽는다면 하루 '날 잡고앉은자리에서 다 읽기'를 추천한다. 덧붙여 책을 읽기 전에는 위를 든든히 채울 필요가 있다. 여느 책과는 달리 체력 소모가 무척 크기 때문이다.
혹시 아직 정유정이라는 세상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는 무척 운이 좋은 사람이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한 뒤 그녀의 작품을 감상하기를 바란다. 어떤 책을 펼치든 전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