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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미 Nov 08. 2023

내가 팔자를 바꿀 상이더냐

 돌이켜보면 참으로 평탄한 삶이었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부족하지 않은 부모님의 경제력 덕분에 학비로 고생해보지도 않았고, 딸로 태어났지만 설움 없이 살았다. 머리도 좋은 편이었고 나름 성실해서 공부도 잘했다. 대학교 진학을 앞두고 친정아버지께서 아프셔서 등록금이 싸고 장학생으로 들어갈 수 있는 교육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분에 넘치는 마음 따뜻한 남편을 만나 토끼 같은 딸아이도 낳아 기르며 지금의 가 되었다. 이만하면 모자라지도 지나치지 않은 딱 중간의 삶. 큰 어려움 없이 순탄한 인생의 강을 건넌다고 부러움도 받아봤다.



                                               스스로 인형이 되다


 하지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아버지는 가슴에 불을 가지고 사는 남자였고, 어머니는 그저 힘없는 여자일 뿐이었다. 때로 아버지의 휘몰아치는 불꽃에 활활 타시던 그런 어머니를 곁에서 보면서 가슴속에 재가 쌓였다. 밤에 숨죽여 우는 어머니의 흐느낌을 느끼면서 잠들던 밤들도 제법이었다. 어머니가 멀리 떠나실까 봐 잠들기 전 그녀의 손목에 줄을 이어놓고 선잠을 자던 때도 있었다. 

 그런 유년기를 보내면서 자발적으로 어머니의 자랑거리, 보상이 되기를 자처하면서 인형이 되었다. 스스로 인형이 되어버린 태도는 직장에서도 거울처럼 그대로 투영이 되었다. 그저 좋은 사람, 거절 못하는 사람, 잘 웃는 사람. 가면을 쓰고 살았다. 점점 더 버거웠다. 그러다가 신경정신과라는 곳에도 방문하게 되었다. “우울증, 불안장애”, 뉴스에서 흔히 보던 병명이 꼬리표처럼 붙게 되었다. 아버지와 똑같이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았고 표현하기 어려운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와 같은 불이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모습을 마주하는 순간이 찾아오면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세상으로 걸어 나와 자신과 마주하다



 작년, 갑작스러운 남편의 일본 파견 근무가 결정되었고, 휴직 후 일본에서 지내면서 시간이 생겼다. 그리고 이은경 선생님의 “브런치 작가되기‘ 프로젝트를 만나 생애 처음으로 나의 글을 쓰게 되었다. 솔직히 교사로 살면서 많은 글을 써왔다. 사소한 공문 작성부터 성적표 내용 쓰기, 보고서 등 제법 많은 글을 써왔다고 자부해 왔다. 하지만 그 속에 내 글은 없었다. 지금의 감정을 오롯이 담아 쓴 내 글 말이다. 

 요즘은 매일 적은 분량이지만 책도 읽고 일상의 이야기를 글로 쓰고, 꾸준하게 운동을 하는 삶으로 바뀌게 되었다. 선생님의 호칭이 익숙하던 차에 이제 작가님이란 호칭이 하나 더 생기게 되었다. 과거의 미운 감정, 무기력함, 부끄러움도 다 녹여 글을 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물론 힘든 과거 이야기를 이렇게 글로 남기는 것이 괜한 일 하고 있나 하는 후회감이 드는 순간도 있었다. 지인들이 글을 보고 뭐라고 생각할까,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부끄러움도 모르고 제 이야기한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까.

 “내가 당신을 아는 사람이면, 글을 보고 너를 안아 줄 거야. 너무 잘 컸다고, 참 대견하게 삶을 살아 내오고 있다고, 그러니 부끄러워하지 마.” 남편의 따뜻한 말에 용기가 났다. 

 브런치에 첫 글을 발행한 날, 세상으로 걸어 나온 첫날이었다. 새하얀 눈이 온 세상을 다 덮은 겨울의 아침, 드디어 눈 위로 첫 발걸음을 찍어본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 오롯이 혼자 갈 수 있고 가야만 하는 그 길을 설렘 가득한 마음으로 내디뎌보았다. 기쁨과 뿌듯함으로 벅차오르기도 괜스레 서럽기도 하는 등 양가적인 감정이 든 뭐라 설명하기 힘들었던 첫 발행의 날.


                                       행복도 팔자도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 흔한 말로 “팔자”라는 것이 있단다. 사전에는 팔자를 이와 같이 정의한다. ‘사람이 팔자의 좋고 나쁨에 따라 그 일생(一生)이 좌우된다는 관념에서, 일생의 운수를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됨’. 팔자의 좋고 나쁨에 따라 일생이 좌우된다니, 조금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살다 보면 인간의 힘으로 어찌 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마치 신이 잠시 머물렀다가 인연을 맺어주고 떠난 것 같던 순간들 말이다.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던 순간, 아이가 찾아온 그 행복하던 날, 아이가 첫울음을 터트린 날, 하지만 갑작스레 찾아온 순간을 잡아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은 바로 노력이다. 고리타분하지만 좋은 아내와 엄마가 되어주는 것, 일상의 작은 찰나의 순간에도 행복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은 부단한 노력과 연습이 있어야만 하는 것, 갑자기 찾아온 순간에 감사하고 나 또한 일부를 내어주어야 하는 수고를 거쳐야 행복할 수 있다. 글을 쓰는 순간은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마음이 아프기도, 힘들기도 하는 시간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동기들과 함께였고, 매 순간이 오롯한 인내와 노력이었다. 글을 쓰면서 과거의 자신을 보듬고 아버지를 용서하고 안아줄 수 있었다. 그러기에 팔자라는 것이 있다면, 우울증과 불안장애의 무채색인 팔자, 그것 내가 한번 바꿔 보겠소, 이 브런치로 말이요.     

 



“태어난다는 것은 늘 어려워요. 새도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를 쓰지요.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토록 어렵기만 했던가요? 아름답지는 않던가요?.”                                                                         -데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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