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상일기 #015
어울리지도 않는 더플코트에 보온 도시락까지, 잔뜩 무장한 나를 보며 할머니는 눈시울을 붉혔다. 기특혀, 기특허지 그럼. 잘 허구 와 으이? 갈까 말까 망설이는 나를, 한참 부둥켜안고 문질렀다. 할머니의 토닥임에 몸을 맡기며 나는 멍해졌다. 공부 잘한다고 소문난, 벽산 아파트 사는 찬이나 입을 것 같은 더플코트를 내가 입어도 되나. 친손주도 한 번 못 먹어 본 이 뜨거운 도시락을 내가 먹어도 되나. 이런 호사를, 얹혀사는 내가 그깟 시험 좀 본다고 누려도 되나. 일찌감치 동력을 잃어버린 것 같은 삶에 할머니는 자꾸 전력을 넣었다. 푸슈슈- 폐병 환자 같은 소리만 낼뿐, 당최 움직일 줄 모르는 고장 난 나를 할머니는 쉼 없이 일으켜 세웠다. 이 감정이 죄책감이든 부채의식이든 간에, 나는 그냥 할머니가 웃는 게 보고 싶었다.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할머니를 위해 뭐든 하고 싶었다.
할머니, 내가 나중에 진짜 존나 비싼 코트 사 줄게.
어, 뭐야. 어어? 이어지는 정답 행렬에 꿈인가 싶어 몇 번이고 볼을 꼬집었던 수능 날. 짧은 노력도 노력인가? 이제야, 나도 빚을 갚을 수 있는 건가? 삶이 달라질 수 있을 거란 희망에 설렜던 기억이 내게도 있다. 몰락한 인간의 응원이 진심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두 파이팅. 나 원 내가 이런 말을 하다니. 어쩐지 날이 딱 좋다. 예전엔 수능한파니 하는 말도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