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스터로이드 시티
잠을 자지 않으면 잠에서 깰 수 없어요
애스터로이드 시티(웨스 엔더슨 감독, 2023)
영화가 끝나고 엔딩 음악을 들으며 나는 속으로 폭소를 터트렸다. 하이텐션의 소리까지 지를 뻔했다. You can't wake up if you don't fall asleep이라니. 내가 그래서 여름내 3번이나 보면서 계속 잤던 거야? 무의식에서 영화의 주제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 엔딩곡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자막이 올라가며 새 한 마리가 음악에 리듬을 타며 걷는 장면에서 매번 깨어났다. 황당해하며 주섬주섬 나오기 바빴다. 3번 다 새만 본 것이다.
수원미디어센터 12월 상영목록에 '에스터로이드 시티'가 들어 있었다. 4번 째로 설욕할 수 있는 기회가 드디어 찾아왔다. 이번에는 끝까지 졸지 않았다. 더 황당하다. 다 보았으나 잘 모르겠다. 내가 나비인지, 나비가 나인지. 장자의 호접몽蝴蝶夢이다. 장자는 2,500년 전 인식의 영역을 꿈속으로 까지 확장하였다. 이미 꿈을 가상세계로 인식하였다.
영화는 3단의 액자 구성으로 되어 있다.
1단 : 마이크 앞의 사회자가 무대의 연극을 소개하고 있다. (흑백)
2단 : 무대 위의 연극에서는 극작가가 잠옷 차림으로 타자기 앞에서 극을 쓰고 있다.(흑백)
극작가가 잠옷을 입고 자면서 타자기로 두드리는 내용은 꿈속의 내용이다.
3단 : 극작가가 쓴 내용. 에스터로이드 시티가 펼쳐진다. (컬러)
1955년 가상의 사막도시, ‘애스터로이드 시티’. 운석이 떨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소행성의 날’에 모인 사람들. 엄마의 죽음을 모른 채 아빠와 참가한 세 딸과 천재 아들. 우주무기를 개발하는 청소년 과학천재들. 원폭과 버섯구름. 외계인의 출현으로 봉쇄되는 도시. 끊임없이 엉뚱한 행동을 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아이. 움직임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개연성이 전혀 없는 이야기들의 연속이다. 심지어는 극의 주인공이 극 속에서 튀어나와 이해를 못 하겠다고 한다. 연출가는 그냥 계속하라 한다. 죽은 아내는 컬러의 꿈속에서 다시 흑백의 현실에서 연극을 하고 있다. 여러 겹의 레이어가 들어 있다. ‘가타리’와 ‘들뢰즈’의 ‘천 개의 고원’이 연상되는 장면이다. ‘리좀’의 인식론적 변주이다.
봉쇄가 풀리고 사막의 선인장 옆에 엄마의 유골함을 묻는 세 딸과, 아들, 주인공과 장인. 그리고 호텔에 내걸리는 Vacancy. 결국 비워지는 도시. ‘자 다들 꿈을 깨세요. 현실로 이동하세요. 우리는 컬러의 세계에서 흑백의 세계로 갑니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각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표정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희로애락이 표현되지 않는다. 웨스 앤더슨 감독의 모든 작품이 다 그렇다. 고독이다. 무감각이다. 모든 것들이 꿈속을 재현한다. 의식의 흐름을 찾아보지만 연결되지 않는 무의식뿐이다. 꿈일 뿐이다.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영원히 순회한다.
감독의 고차원적인 알레고리를 이해하는 것이 관건이다. 감독의 고독이 만들어낸 풍경이다. 가상의 세계, 거대한 메타버스. 꿈을 현실로 만들고픈 욕구가 만들어낸 무한한 가상의 세계다. 현대인들이 만들어낸 고독과 과학의 결합물이다.
'자비스 코커'(Jarvis Cocker)가 부르는 엔딩곡. ‘You can't wake up if you don't fall asleep’. 이 영화의 주제가 오롯이 담겨있다. '레너드 코헨'으로 혼동할 정도로 목소리와 분위기가 비슷하다. 꿈속과 잘 어울리는 저음의 향연. 노래가 끝나면 꿈에서 깰 수 있을까. 아니, 잠을 자면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가상현실로 들어갈 수 있다. 잠에서 깬 듯 살아나간다. 잠을 자고 꿈을 꾸는 것만이 그 속에서 깨어나는 길이다.
잠을 자다가 깨어나는 것이 일반적인 순리다. 여기서는 잠이 들어 꿈을 꾸는 것만이 인식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이다. 장미를 심지 않으면 장미의 향을 맡을 수 없는 것처럼. 잠이 들어야만 깰 수 있다니. 잠을 자지 않으면 영원히 꿈속이다. 역설이다.
장자의 호접몽.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는데, 내가 꿈에 나비가 된 건지, 나비가 꿈에 내가 된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