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 화장실에 들어가니 나오는 음악. 쇼팽 왈츠 10번(Op.69 Nr.2 b단조). 알고리즘이 작동할 리 없는 오프라인인데, 내가 지금 치고 있는 곡을 어찌 알았을까, 신기하다. 무려 10쪽에 달하는 화려한 대왈츠 1번(Op.18 Eb장조)을 겨우내 쳐서 간신히 끝내고 새로 시작한 곡이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아픔을 그린 곡이어서 왈츠이면서도 서정적 멜로디가 돋보이는 곡이다. 이미 사랑의 아픔 따위에 공감하지 않는 나이지만 멜로디 자체가 워낙 아름답다. 나 같은 초보에게 1번 왈츠는 왼손 도약이 심하고 동시에 여러 음을 정확하게 눌러야 하는 난곡이다. 아직 손에 제대로 익히지도 못한 상태다. 10번을 쳐보니 멜로디 라인도 애절하고 왼손 반주도 다소 쉬워 보여서 연습에 매진하고 있는 중이다. 무엇보다 4쪽밖에 안된다. 이렇게 공중 화장실에서 만나니 반갑다. 끝까지 듣고 나왔다.
1층 피아노 교습소는 5층 집에서 엘리베이터만 타고 내려가면 된다. 비가 오는 날에도 우산 없이 슬리퍼를 끌고 갈 수 있는 소위 슬세권이다. 앞에는 성악 스튜디오, 옆에는 프랜차이즈 커피집이 있어서 연습할 때 각성제 공수 하기도 쉽다. 피아노를 치는 지인이 나의 이런 환경을 부러워한다. 그녀는 결국 거리 때문에 레슨을 중단하였다고 한다. 레슨은 일주일에 한 번, 연습은 수시로 할 수 있다. 꼬마들이 없는 오전이나 저녁. 가끔 만나는 꼬마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머리 허연 할머니가 피아노를 배우는 광경에 연습실을 기웃거리다 눈이 마주치면 얼른 피한다. 귀여운 동학들이다.
얼마 전 드디어 동지가 생겼다. 나보다도 한참 위인 피아노 초보자가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몇 년 전 뇌경색이 와서 손가락이 부자유스러워지자 주변에서 재활 겸 피아노를 쳐보라고 권했다고 한다. 사실 나도 피아노를 치면서 손가락의 움직임에 따라 뇌가 반응하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왼손 4, 5번 손가락 연결음이 자꾸 뭉개지다가 아농의 스케일과 아르페지오를매일 연습하고 나니 독립적으로 근육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칠 때마다 뇌가 관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하였다. 당연히 치매 예방에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피아니스트도 치매는 걸린단다.
이분이 또 열심이다. 연습하러 내려가면 늘 먼저 와서 하고 있다. 지루하게만 흘러가던 일상에 이런 변화는 작지만 도약의 계기가 된다. 나도 더욱 열심히 해야겠다. 나중에 합동 연주회라도 해야 할까 보다. 학예회 수준일지라도.
5년이나 10년쯤 후에는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서 간단한 연주회를 해 볼까 고민 중이다. 그래서 플레이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다. 일단 목표가 있어야 연습을 조금 집중적으로 할 테니. 그때 가서 못하는 한이 있더라도 연습한 곡들과 연습한 시간은 나의 것으로 남을 것이다. 모차르트 소나타 하나, 베토벤 소나타 하나, 쇼팽 왈츠 하나, 바흐 칸타타 예수-인간 소망의 기쁨, 바흐 시칠리아노, 차이코프스키 6월 뱃노래 등등. 그런데 정말 심각한 문제가 있다. 새로운 곡을 치다 보면 앞에 쳤던 곡은 어느새 기억에서 사라지고 있다. 쳐보면 떠듬떠듬 새롭다. 누구 말대로 불가능하니까 꿈이라도 꾸어 보는 것이다.
그저 노년의 시간 때우기 정도로, 절대로 스트레스받지 않고 조금씩 하기로 했지만 노년이기에 더욱 가성비 나쁜 악기 연습은 조금 허망하다. 두 보 전진하면 한 보 후퇴하는, 자꾸 물살에 떠내려 가는 듯한,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 같은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역시 연습만이 살길이다. 어디 악기 연습뿐이랴.
더위가 조금 견딜만하다. 일 없는 날에는 오전 오후로 나누어서 2시간씩 총 4시간씩 연습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건 가능한 일이고 꿈도 아닐 것이다. 실행에 옮겨본다. 그러나 오전에 2시간 연습하고 오후에 다시 내려가니 1시간 겨우 채우고 더 이상은 머리가 몸을 통제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손가락 끝도 아프다. 피아니스트들이 걸린다는 건초염이라도 생길 것 같다. 아 이런 시련이. 어린 시절 그렇게도 하고 싶었던 피아노를 마음껏 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제는 몸이 견디지를 못한다. 이것이 내 인생에 주어진 즐거움의 총량인 것 같다. 그냥 여기까지. 마음을 내려놓는다. 연습은 현실이고 무대는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