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난 실내화 위에 청록색 물감얼룩
실내화 사주세요.
“엄마 실내화 사주세요”
“사준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찢어졌는데 어떻게 해요”
“응 내일 새벽배송으로 올 거야”
나에게 어릴 적부터 한이 맺힌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산, 가방, 실내화.
우산, 가방은 둘째로 미뤄두고 오늘은 실내화 이야기만 해야겠다.
우산, 가방 이야기를 실내화에 붙여 쓰다 보니 내가 좀 초라해진다.
얼마나 없었다고 써야 이 이야기가 끝이 날까. 내 과거가 너무 없던 시절처럼 보여 지워버렸다.
그 정돈 아닌 것 같은데. 마음만은 행복해서 그랬나?
분명 내 과거는 그렇게 초라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와 행복한 시간이 참 많았다.
지금도 가끔 과거를 회상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때 너무 좋았어..라고 말하니깐
하지만 분명 나의 과거에도 싫었던 작은 부분은 있었으니깐.
그러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 생각한다.
지금 나를 만들어 준 나의 과거에는 실내화라는 감추고 싶은 것이 있다.
나의 국민학교시절. 지금은 초등학교지만.
그 시절 학교에선 실내화를 신었다. 천으로 된 하얀 실내화였다.
나는 토요일 4교시를 하고 온 날에는 마당에서 칫솔보다 큰 솔로 실내화를 빨았다.
비누를 묻히고 박박 비비면 거무스름하던 실내화가 하얗게 되었다.
마당 끝 파란 대문으로 동네 아주머니가 들어오며 실내화를 빨고 있던 나를 보면
“우리 집 만철이는 지 엄마가 빨아줘야 가져가는데 우리 와우는 직접 빠는구나 착하다.”
나는 그럼 더 힘이 나서 박박 비벼 실내화를 빨았다.
그 실내화는 면으로 된 재질이라 그렇게 빨면 금방 해져버려 낡아지는데도 말이다.
하얗게 빨아진 실내화를 월요일에 신고 가면 금세 거무스름해지지만 월요일만큼은 꼭 하얀 실내화를 들고 갔다.
하지만 한 달만 지나면 실내화 엄지발가락 부분이 구멍이 난다.
구멍의 지름이 0.5센티가 됐을 때
“엄마 실내화 구멍 났어”
“왜 너만 그렇게 빨리 구멍이 나냐”
엄마는 발가락 생김새가 구멍이 잘 나게 생긴 나를 원망하듯 말하였지만 실내화를 새로 사라고 3,000원을 주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구멍 난 실내화를 빨고 그걸 또 신고 갔다.
이번엔 살살 빨았는데 구멍이 더 커져서 학교에 들고 갔다. 이젠 구멍뿐이 아니라 구멍 난 부분에서 나오는 실밥들이 너덜너덜 매달려있다.
긴 파마머리 주영이는 옷도 예쁘게 입고 왔는데 내 구멍 난 실내화를 뒤에서 말하고 다니며 흉을 봤다.
내가 신었지 너보고 신으라고 한 거 아니잖아.
어느 날, 미술시간이었다.
나는 그림도 참 못 그렸는데 그림을 다 그리고 바탕을 꼭 주황색으로 칠했다.
언니가 완성된 내 그림을 보고는
“넌 왜 맨날 바탕이 주황색이야? 주황 좋아해?”
“나 주황색 싫어해.”
언니가 매번 그렇게 말하니 그날은 주황색으로 하기 싫었다.
그래서 청록색을 꺼내 바탕을 칠했다. 아주 진한 청록색.
내 책상 끄트머리에 물감 짠 팔레트를 두고 칠하고 있는데 지나가던 어떤 남자아이가 내 책상을 툭 쳤고 그 팔레트가 떨어지며 내 실내화를 훑고 지나갔다.
내 구멍 난 바로 그 실내화 부분에 청록색이 시퍼렇게 묻었다. 그 처참한 장면을 본 내 마음도 시퍼렇게 멍든다.
내 하얀 양말까지 스며들게 만든 그 범인은 그 구멍이다. 구멍만 아니었으면 양말에는 안 묻었지.
나는 집에 와서 실내화를 빨았다. 누구를 탓할 필요도 없이 벅벅 비벼버렸다.
구멍 난 실내화보다 그 청록색은 더 싫다.
제발 구멍 난 거 원망 안 할 테니 물감색만 빠지게 해 주세요.
누군가에 간절히 바라며 빨았는데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첩첩산중
구멍 난 실내화 위에 청록색 물감 자국.
난 그 상태로 학교에 갔다.
모두들 깨끗한 실내화를 신고 있지만 나만 청록색으로 얼룩진 구멍 난 실내화다.
“엄마 제발 3,000원 줘”
“왜~”
”실내화 사게 달란 말이야 “
엄마는 그러고도 3일 뒤에나 돈을 줬다.
없었겠지.. 형편이 그랬겠지.
그래서 새로 산 실내화는 나를 떳떳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힘들게 가지게 된 새 실내화이건만 한 달도 안 되어 구멍나버린다.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실내화와 씨름을 했다.
아닌가. 엄마한테 실내화 살 돈 달라고 싸운 건가.
나에게 한 달에 하나가 필요했다면 실제로 1년에 10켤레 이상 필요한 건데 나에게 1년에 새 실내화는 고작 3켤레 정도였다.
고등학교에 가고 나서야 실내화를 신지 않아도 되는 학교가 되어 나는 좋았다.
내가 자식을 낳고 학교를 보내보니 실내화는 그대로 신고 다닌다.
하지만 EVA재질이다.
부드럽고 질긴 느낌의 재질. 그러니 안 찢어지지.
우리 아이들은 실내화가 작아져서 새로 사게 되지 찢어져서 산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 집 귀여운 빌런 막내아들.
사준 지 한 달도 안 되어서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또 찢어졌어요”
“뭐가?”
“실내화요”
“아니 그게 왜 찢어져??”
난 놀라서 몇 번을 묻다가 사놨지만 왜 그런지를 알게 된 건 한참뒤였다.
“언니 그거 알아?”
내 여동생은 우리 집 막내아들과 동갑짜리 아들이 있고 같은 동네를 살아서 동생네 아들과 내 아들은 같은 학교에 다닌다.
점심시간마다 만나서 피구를 하기에 피구공도 사줬다.
그런 동생이 어느 날 연락이 와서 그거 아냐고 묻는다.
“뭘?”
“얘들 점심시간마다 피구 할 때 실내화신고 나간 거 같아”
“실내화??”
“그렇지 않고서야 한 달에 하나씩 실내화를 사달라고 하는 게 말이 돼?”
“너도 한 달에 한번 샀어?”
“언니도야?”
그렇게 알게 되어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조용히 물었다.
“혹시 실내화 신고 운동장 뛰어다녔니?”
“흠흠..”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참는 행동을 하는 거 보니 뭔가 엄마한테 걸렸다는 뜻이다.
“우리 아들 오늘 엄마한테 정신교육 좀 받아야겠다.”
“그거 실내화 얼마한다고요”
“실내화를 신고 거친 모래밭을 뛰어다니면 어떻게 해 “
“알았어요. 이젠 운동화 신고 나갈게요”
정확히 17일 뒤
“실내화 사주세요”
“또야?”
라테는 실내화 사달라고 해도 안 사줘. 구멍 난 거 신고 다녀야 해..
라고 하려다가 조용히 쿠팡에 주문을 건다.
내일 새벽까지 도착하도록 조용히..
그깟 실내화로 네가 한이 맺히는 일이 없도록…
내 설움 느끼지 말라고 해주는 이 엄마의 마음은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