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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뚜로루디 Mar 13. 2023

나를 찾지 말아 주세요

여러 가지 일 모두를 '지긋지긋함' 이라는 감정 하나로 퉁치며 살기


요즘은 화를 내는 법을 잊어버렸나 싶을 정도로 무던해졌다. '화를 내지 말아야지' 라고 스스로의 감정을 누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화내야 마땅한 상황에서 해결 방법만 고민하느라, 혹은 험한 말 하기 싫어 상냥한 말씨로 네네 하느라 죄송하다는 소리조차 못 들었다는 걸 누가 알려줘서 알았다. 애초에 화를 잘 내는 성향이 아니고, 내더라도 나 자신에게 내거나 혹은 글로 정리해 1번 2번 3번 조목조목 따져가는 편인데 요즘은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신경 써봤자 머리만 아픈 거, 굳이 일일이 신경 써야 하나 싶은 것도 있고. 다시 생각해 보니 그냥 화를 내기 싫은 것이었다. 더 파고들어 가 보면, 에너지를 쓰는 것이 싫은 것. 내가 죽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화내야 하나 싶고. 그런데 남의 문제일 때면 내가 대신 화내는 것처럼 욕지거리를 섞어 한바탕 험한 말을 하고 같이 화를 내주곤 한다. 그렇게 안 하면 섭섭하니까. 그리고 받아야 할 것을 못 받았다면 좀 짜증 나고. 받을 건 받아야지. 그런 마음.


어느 날은 연락이 폭발적으로 왔다. 아주 작고 사소한 도움이 필요한 친구부터 미팅을 제안하는 사람들, 간단한 일을 맡기는 사람까지. 능력이라고 해봤자 모든 분야에 있어 아마추어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돈 주고 쓰겠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한 상황이다. 그중 하나는 몇 년 전 화가 나는 일이 있어 달려들고 번호 매겨가며 화를 냈던 사람이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연락을 해 일과 관련된 문의를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그렇게 없나, 싶기도 했지만 어쨌든 돈 받고 하는 일이니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중이다.


어쨌든, 앞 단락의 긴 문장들은 내 답 없는 거만한 행태에 조금이라도 방패를 들어 비난을 막아보고자 하는 말들이었다. 거짓말처럼 '루디야' '루디 씨' 로 시작하는 톡이 아주 여러 개 왔을 때, 나는 그것들을 일제히 못 본 척, 거의 반나절에서 하루를 묵혔기 때문이다. 답장 역시도 아주 느리게 했다. 세 시간, 네 시간, 어떤 건 하루 간격으로. 이번만 그랬을까, 사실 누가 나를 찾을 때면 내 발등에 불 떨어져서 내가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은 언젠가부터 늘 그랬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운 충격을 받은 것은, 몇 번 클릭만 하면 해결되는 아주 오랜 친구의 가벼운 연락도 보기 싫었다는 점이었다. 약속을 잡자는 연락도, 내가 필요하다는 연락도, 일을 같이 하자는 연락도 그 모든 게 전부 싫은 것을 보니 정말 이제는 누가 나를 필요로 하거나 찾는 것이 싫은 것 같다. 그냥 나를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를 챙겨주고 안부는 묻되 내가 뭔갈 해야 하는 것은 맡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나를 꼭 필요로 하는 일이더라도 그냥 나를 기억만 하고 찾지는 않았으면..


아침에 눈을 뜰 때면 하루가 얼른 지나가길 바란다. 그리고 그 하루가 가라앉는 하루가 되지 않길 바란다. 하지만 역시나 어느 때를 기점으로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하면 그렇게 절망스러울 수가 없다. 매트리스 아래로 꺼져가는 것처럼 무겁고 진득한 무기력을 느낀다. 그럴 때면 할 수 있는 게 자는 것밖에 없다. 한 번 자면 그래도 한두 시간은 지나가니까. 그렇게 눈을 감으면, 운 좋을 때는 꿈을 꾸지 않지만 운이 안 좋을 때면 안 좋은 꿈을 꾼다. 서로 손을 잡은 커플이 불에 타고,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기 위해 바다를 건너는 그런 꿈. 뮤직 비디오나 단편 영화 속 한 장면으로 쓰이면 좋겠다 싶어 메모장에 적어두긴 했다만, 저런 꿈을 꾼 다음 일어났을 때 마주한 게 현실이라면 휴식을 휴식처럼 느낄 수 없다. 도피하고 싶어 비행기를 탔는데 추락해버린 느낌과 비슷할 것이다.


3년 전 어떤 친구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가는 거야. 미래에 무슨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니까 현재를 살고, 살아. 죽지 말고 살아.' 그 친구는 지금 발리에서 일 년째 살고 있다. 얼마 전 그는 나에게 전화해 '거리낄 게 뭐가 있어, 너 지금 일이 없댔지. 있어? 있다 해도 프리랜서고, 외국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잖아. 나는 현재를 살고 있어. 지금을 즐기고 있다고. 내일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알 게 뭐야. 비행기 표 끊어줄 테니까 와. 내일 뭐 없지? 내일 당장 와.' 라고 말했다. 거의 넘어갈 뻔했으나 이 친구와 나의 관계도 그다지 건강한 관계는 아니기에 거절했다.


하지만 나도 여행에 대해, 다른 도시나 해외에서 한 달 살기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진작에 했어야 할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담 선생님이 말씀하셨듯 지금 내 상황에 있어 무작정 떠나는 이 선택은 신체적 독립이 될 수는 있어도 정신적 독립이 될 수는 없다. 여전히 나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나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주는 가족이라는 요인을 모른 체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실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그곳이 어디든 나는 무조건 죽은 모습으로 발견될 것만 같다. 실제로 실행에 옮길 가능성은 적지만 자꾸 그런 이미지들이 떠오른다. 재미있게 보내리라는 확신도 없다. 우울증이 심했을 때 간 여행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딜 가든, 얼마나 재미있게 보내든 모든 하루의 끝은 결국 나의 죽음일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며칠 전에는 죽는 상상을 했다. 꽤 구체적이었고, 정신을 놓으면 정말 그렇게 해버릴 것 같아 미친 사람처럼 입 밖으로 '죽으면 안 돼. 죽으면 안 된다' 를 여러번 내뱉었다. 일부러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에 손을 얹고 방 안을 계속 돌아다니면서 저걸 주문처럼 외웠다. 뭔갈 할 수 없도록 일단 침대에 누웠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난 뒤 간신히 진정될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오늘은 무슨 힘으로 살아가야 할지. 내일은 무슨 힘으로 살아가야 할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막막했다. 전화라도 어디 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직장인들의 일반적인 퇴근 시간 훨씬 전이었고, 전화해서 냅다 죽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받아줄 리도 없고, 어색한 통화가 될 것이 뻔하며,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징징대고 매달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짜증나는지 잘 안다.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다.


이번 달은 좋아하는 드라마도 몇 편이나 공개되고, 기대되는 영화도 공개되고, 좋아하는 가수가 신곡을 몇 년만에 내고, 예약 구매한 가방이 3월 말에 배송되니 그 때까지는 살아 있어야겠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농담으로라도 3월을 버티고자 했던 발악이었다. 그렇게 농담처럼 이번 달엔 꼭 살아 있어야겠다고 말하고 다녔지만, 이 때 알았다. 정말 죽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면 그런 건 다 아무렇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죽는 마당에 누구의 신곡이, 누구의 드라마가 무슨 상관이야.





질문 1. 죽으면 주변 사람들은 어떻게 해요?

답변 1. 몰라, 알아서 잘 살겠지.



질문 2. 죽으면 가족들은 어떻게 해요?

답변 2. 그게 좀 걱정이긴 한데 지금 당장은 나의 고통밖에 보이지 않아서 할 말이 없다.



질문 3. 왜 죽으려고 해, 죽지 마. 살아 있을 때 좋은 게 얼마나 많은데요. 그런 거 없어요?

답변 3. 저도 질문 좀 할게요. 삶이 뭐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그 좋은 순간, 그거 한 순간을 위해 왜 고통 어린 날들을 무기수처럼 보내야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 그 좋은 순간 하나를 위해 왜 버텨야 하는지 진짜 모르겠다고요.



질문 4. 자살하기에는 너무 아깝잖아요. 죽지 마요.

답변 4. 네, 저도 알아요. 이 키에 이 몸에 이 인성으로, 이 시국에 젠더 감수성과 성 인지 감수성까지 알뜰하게 챙긴 인성이 어디 쉽습니까? 그리고 애매한 재능도 어쨌든 재능이라면서요. 아주 애매한 재능이라 비비기도 민망하지만 어쨌든 가지고 태어나는 거 쉽지 않아요. 상대 비위 맞춰서 말할 줄 알고, 동물 예뻐하고, 애들은 정말 싫어하는데 그래도 눈 앞에서는 아이고 예뻐, 할 정도로 사회성 키웠고.


근데 이런 생각하면 너무 웃긴다? 자만도 이런 자만이 없어. 간신히 가면으로 가리고 살았지, 아주 나르시스트야. 살면서 들어온 객관적 평가와 내가 보기에도 내 스스로 마음에 드는 구석을 종합해 보면 대체로 죽기 아까운 이유가 저것들인데, 이런 걸 보면 나도 나 자신에 대해 좋아하는 구석이 있기는 하는구나, 생각이 든다. 근데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미 저렇게 생각해 왔던 거야. 그러면서 괜히 나 스스로한테도 솔직하지 않고 착한 척 하고. 나 스스로를 이렇게나 거만하게 고평가하는 부분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장 솔직해야 할 나 자신에게도 가면을 쓰고 저렇게 겸손 떨고 있었다는 걸 깨달으니 기분이 더러워진다. 그리고 이 '아깝다' 라는 건 나에게 있어 윤회가 존재할 때나 아까운 거지, 무신론적 입장에서 보면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 거 있잖아, 다시 태어났는데 지금보다 훨씬 안 좋은 삶을 살 팔자로 태어났다면, 그건 아깝긴 하겠지.



질문 5. 자살하면 지옥에 가는데, 너 지옥 갈 거야?

답변 5. 난 무신론자에 가까워서 종교 자체가 인간이 삶의 목적을 만들고 성취하기 위해 창조된 도구라고 본다. 내가 무신론자에 '가깝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단 하나, 지금 무지개 다리 건넌 우리 강아지만큼은 천국이나 혹은 아주 행복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갔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다. 종교는 참 재미있다. 전세계적으로 아주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는데, 전혀 문화적 교류가 없는 시기에 탄생한 종교들의 스토리텔링이나 교리가 비슷한 성향을 띠는 경우도 많고, 역사를 되짚어 볼 때 그 시대에는 이단으로 취급되었던 종교가 지금은 대형 종교로 인정되기도 한다. 신은 한 명이거나 혹은 여러 명인데, 교리는 어쨌든 비슷하다. '착한 일 하며 살자' '나쁜 일 하면 지옥 간다' '지옥은 아주 무서운 곳인데 거기서는 상상도 못할 형벌을 영원히 받아야 한다' '착한 일 하며 살면 천국에 가는데 거기엔 살면서 평생 누려보지도 못한 것들이 가득 있다'... 등등. 나는 종교학 전공도 아니고 종교학자도 아니지만 수많은 신화적 일화들과 종교들을 보고 있자면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왜 이걸 하면 안 돼?' '왜 나쁜 일을 하면 안 돼?' 에 대한 확실한 리미트가 필요하니까. 인간이 벌을 준다 한들 그 한계는 죽음이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들은 언제나 늘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죽음 이후의 세계가 선악에 따라 명백히 갈리며, 나쁜 짓을 하면 지금뿐만 아니라 영원히 억겁의 고통을 받는다는 설정이 추가되면 사람들은 그 영원한 고통을 두려워하게 된다. 자살의 경우 역시 비슷한 관점에서 해석한 주장이 있다.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간 인적 자원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니, 사회는 그것을 막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 여기에 '선하게 살아 천국을 가는 것' 을 목표로 세상을 선하고 착하게 살며 삶의 기쁨을 찾는 사람의 만류가 추가된다. '너, 자살하면 지옥 가.' 처럼.



질문 6. 그럼 죽지 왜 안 죽고 있어요?

답변 6. 우습게도 TV 전원 꺼지듯, 컴퓨터 파워 나가듯 그렇게 제 의식이 어이없이 픽 나가 버리는 게 무서워서요.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늘 말해오던 나는 여기에서 역설적인 포인트를 찾았다. 의식이 사라지는 것이 싫다는 것은 내 의식에 집착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직도 붙들 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서워하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여하튼 나는 영원히 오래 사는 것이나 윤회 같은 것은 끔찍이도 싫어하면서 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또 무서워한다. 내가 사라지는 것. 나의 자아가 사라지는 것. 내가 그냥, 없어지는 것. 생각을 할 수 있는 의식이라는 것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 그냥 여기에서 끝인 것. 내가 무서운 지점이다. 그래서 여즉 미련하게 안 죽고 있습니다. 한심하네요. 인간은 살기 위해 어떻게든 하기 싫은 걸 하면서 작은 행복의 순간들을 애써 만들고, 살기 싫은 사람들은 삶은 싫지만 소멸은 더 싫기에 죽고 싶다, 죽고 싶다 고장난 앵무새 인형처럼 되뇌이면서 계속 미끄러지는 게. 도대체 인간은 왜 사는지. 삶을 관통하는 대단한 목적을 지닌 사람 일부를 제외하고 다들 그냥, 살아야 하니까 사는 것 아닌가요? 살아야 하니까 살고, 그렇기에 하기 싫은 것들을 하고. 하기 싫은 것들을 해서 얻은 보상으로 소소한 행복을 얻고. 근데 나는 애초에 하기 싫은 것들을 왜 해야 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거기에서부터 의문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해야 할 필요조차도 못 느끼고 있는데, 또 죽을 수 있을 만큼의 용기는 없어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라서.... 진짜 답이 없긴 하네. 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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