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서전을 잘 읽지 않는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냥 마음이 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서전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의 전유물처럼 보이기도 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읽은 자서전은 딱 두 권이 있다. 한때 자서전 읽기가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때 읽은 책이 정주영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김우중의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이다. 생각해 보면, 이 두 권 모두 나도 그 시기의 유행에 편승해서 읽은 셈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읽은 자서전이 바로 지금 소개하려 하는 백정화 작가의 ‘나, 아직 살아있다’이다.
백정화 작가의 자서전은 시작부터가 남다르다. 화상이라는 기억과 그 기억으로부터 이야기를 펼치고 싶었던 작가의 지난날들이 마치 봄바람에 흩날려 떨어진 꽃잎들이 작가의 발아래로 몰려들 듯 그렇게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모여든 지난날의 기억을 눈에 들어오는 대로 하나씩 주워서 책상 위에 펼친다. 그런 기억이 모여서 책으로 태어난 것이 자서전이다. 화상 이야기로 시작한 자서전은 처음부터 고통과 쓰라림과 회한이 뒤엉켜서 앞으로 진행될 자서전의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 듯했다. 복잡한 가계와 종종 난무하는 가정 폭력, 가족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몰랐던 무지함이 불러온 가정 파탄, 그리고 그 안에서 순종하는 삶을 살아온 작가의 모습이 한치의 가감 없이 그려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자서전은 이야기의 전개부터 보통의 글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살아온 인생을 시간대별로 나열한다든지 하는 전개 방식을 말한다. 하지만 작가의 자서전은 작가가 주워 든 꽃잎 같은 기억을 그저 주워 든 순서대로 풀어놓고 있다. 단편 같은 이야기들이 모여서 작가의 인생을 완성한다. 읽다 보면 어느새 백정화라는 사람의 모습으로 형상화한다. 그런 현상을 느끼는 것이 작가의 자서전을 읽는 재미이다.
작가의 글은 자서전임에도 문학적 수사와 감성적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간간이 등장하는, 오뉴월 개 패듯~ 같은 직설적 표현과 ‘송충이와 나는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같은 감성적 표현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작가의 당시 심경에 한걸음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 마력을 보여 준다. 초등학교 시절의 송충이와 스물다섯이 되어 찾은 학교, 그리고 마흔이 훌쩍 넘은 어느 날 찾은 학교의 모습에서 흐르는 세월 따라 변해 가는 학교의 모습은 바로 작가의 모습이었다. 변해 가는 학교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변해 가는 자기의 모습을 회상한다. 이런 방식의 묘사는 화려한 문학적 기법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자연스러운 상상이 가능하게 해 준다. 그래서 책을 읽다 보면, 작가의 글이 어느새 읽는 사람의 마음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이것 또한 작가의 글이 주는 마력이다.
아무리 솔직하게 자서전을 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이라면 조금은 숨길 법한 이야기들도 작가는 본모습 그대로 독자에게 보여 주며 독자에게 먼저 다가간다. 나는 대학 시절 ‘신학적 인간론’이라는 강의를 들으면서 ‘마음의 창’이라는 용어를 처음 접했다. 어렴풋이 기억에 남은 강의 내용을 떠올리자면 아마 이런 내용이었을 것이다. 창의 안과 밖에 서로 다른 존재가 있다. 창은 본디 안에서 열게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밖에서 아무리 열려고 해도 열리지 않는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밖에서도 쉽게 열린다면 안에 있는 사람이 원치 않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다. 사람의 마음도 남이 자기에게 다가와 주기를 원한다면, 스스로 남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자기 마음속 창을 자기가 먼저 안에서 열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타인이 자기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타인이 자기 안으로 들어와야만 자기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마냥 ‘마음의 창’을 열지 않고 꼭꼭 닫아둔 채로 다른 사람이 자기의 모습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공감하면서 이해해 주기를 원해봐야 자기가 원하는 일이 이루어질 리는 만무하다. 백정화 작가는 이번에 자서전을 집필하면서 그동안 꼭꼭 닫고 있었던 자기의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제 글을 읽는 독자는 그 창으로 들어가 작가의 삶에 공감하며 함께 웃고, 기뻐하고, 화도 내주고, 가끔은 그냥 조용히 흐느끼는 작가의 어깨를 다독여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 독자가 한 분이라도 생긴다면 이번 자서전은 소명을 다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는 자서전 곳곳에 자신의 문학적 열망을 은근히 포장해서 감추어 두었다. 하지만 향기가 짙은 꽃은 아무리 감추어도 주변에 항상 향기가 진동하듯이, 작가의 작가적 소양도 아무리 힘든 생활에 쫓겨 살았다고 하지만 영원히 감출 수만은 없었나 보다. 작가는 자서전의 집필에 이 년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 이외에는 전혀 글을 쓸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가 바로 얼마 전에 글쓰기 교실에서 만난 문우들이 모여 책을 한 권 출간한 경력이 전부인 문인이다. 하지만 이 자서전이 작가의 두 번째 글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정도의 세련된 필치를 보여 준다. 어떻게 보면 자서전이라기보다 그냥 소설이다. 읽는 사람이 논픽션이라고 생각하고 읽으니 그렇지, 그냥 픽션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이야기들을 정교하게 꿰맞춰 글을 완성했다. 이 정도의 구성이라면 당연히 누군가의 조언이라도 받아야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작가는 전문적 문인의 지도나 조언을 받은 적이 당연히 없다. 그런 사실을 알게 되면, “글을 쓰는 백정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이 한 줄의 혼잣말이 자서전의 모든 내용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가는 글을 쓰기 위해 지금까지의 모진 세월을 감내해 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자서전을 작가가 이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기 위해 열어 본 자신의 ‘마음의 창’이라고 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으며 작가는 동굴에서 나올 준비를 했다. “~넘어진 아이가 상처를 붙잡고 우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의술로 비관을 없애듯 상처와 아픔을 치료하고 바로잡는 데 빨리 대처하도록 마음을 단련하는 것일세.”라는 구절이 작가의 가슴을 날카롭게 찔렀다. 누군가가 자기의 삶을 구원하러 올 것이라고 믿었던 그때까지의 믿음이 깨지면서, 더 이상 동굴 속 좁은 인간의 틀에 갇혀 그림자만 바라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이제 세상에 나가고 싶다. 그리고 그 넓은 세상에서 작가는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고 싶어 한다. 자서전은 자신을 세상으로 내놓는 장치이자 자신의 실체를 찾아 떠나는 여정의 시작인 셈이다.
모처럼 읽은 자서전이 이렇게 내 마음속에 남을 줄은 몰랐다. 어떻게 보면 그저 평범한 이웃 여자의 한 맺히게 살아온 인생 넋두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이 갖는 매력은 다른 데에 있다. 주위를 보면 누구나 자기가 살아온 생을 글로 남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곧잘 볼 수 있다. 더군다나 누가 들어도 험난한 세월을 헤쳐온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언감생심 내 처지에 무슨 자서전이람? 하면서 글을 쓸 용기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더구나 글을 쓰려면 무엇인가 전문적인 지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사람에게 감히 한 말씀을 올리고 싶다. 백정화 작가의 용기를 본받고자 한다면, 어려울 일은 하나도 없다고 말이다. 그만큼 이 책은 그런 사람들에게 용기 내어 글을 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지침서 역할을 충분히 하고도 남을 책이라 믿는다.
이제 책을 읽는 것은 독자의 선택이다. 하지만 나는 가급적 많은 잠재적 독자가 이 글을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글을 읽는 시간의 몇 곱절되는 깨달음을 독자에게 안길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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